경제시평
전세사기특별법과 대통령 거부권
박근혜 대통령 탄핵절차가 진행되고 있던 2017년 1월 12일 전세사기의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이날 국토부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 시 “보증금 3억, 1년에 38만원이면 100% 보장받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보증금이 집값의 90%를 넘으면 90%만 보증하던 것을 100%로 확대했다.
집값이 3억원일 때 전세가가 3억원인 전세가율 100% 전세, 즉 무자본 갭투기를 국가가 보증제도를 통해 공식화한 것도 문제지만 ‘보증가입 시 전세계약이 100% 안전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정보를 유포한 것은 전형적인 허위·과장 광고였다.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 못하는 불완전한 보증제도
현행 보증제도는 완벽한 제도가 아니다. 우선 전세금을 지킬 수 있는 전제 조건인 ‘보증가입’이 어렵다. 지금도 전세금이 집값의 100%를 초과해 보증에 가입할 수 없는 매물이 많다. 잔금지급일과 전입신고일 중 늦은 날부터 보증가입 신청을 할 수 있어 잔금까지 다 치른 후에야 가입할 수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보증가입을 전제로 계약했지만 가입하지 못한 피해자가 많은 이유다.
다행히 보증에 가입해도 안심할 수 없다. 계약기간 중 HUG가 일방적으로 보증을 취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는 HUG가 위조된 계약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채 보증을 내줘놓고 “속았다”며 보증을 일방적으로 취소해 대규모 피해가 발생했고 이에 대한 집단민사소송이 진행 중이다. ‘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1년이 되었지만 LH공사의 피해주택 매입 실적은 전국 1건에 불과하다.
야당은 피해자 구제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선구제 후회수’를 핵심으로 하는 특별법 개정안을 21대 국회 종료 전에 통과시킬 방침을 밝혔다. 이후 정부는 개정안 반대 취지의 관제 토론회를 세 차례 개최했다. 대안 제시도, 피해자 의견 청취도 없었다. 정부는 개정안의 본회의 표결 하루 전에 지원방안을 발표했다. 지난 1년간 실적이 고작 한건인 LH공사의 매입 확대가 핵심 내용이다.
‘용산 대통령실에서 급조된 토론회 날짜까지 직접 챙긴다’는 이상한 소식이 들리더니 5월 28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안에 대해 바로 다음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정부는 ‘보증금 채권 평가가 기술적으로 어려워, 예산 추계를 할 수 없고, 예산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소요 예산에 대해서는 ‘5조원’ ‘2조~3조원’ ‘1조원 이상’ 등 그때 그때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예상 피해규모 3만 6000건에 평균 피해금액 1억3800만원을 곱하면 5조원이 나온다. 개정안에 ‘피해액 전액 보전’이 담겨있지 않은데 정부가 소요 예산을 과장해 ‘수조원의 혈세가 투입된다’며 여론전을 펼치는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선구제 후회수’ 법안 22대 첫 국회에서 통과돼야
정부가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채권 평가 금액을 이미 알고 있는 피해자들이 많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보증금 회수가 어려운 후순위 임차인이면서 소액임차인도 아니어서 보증금의 30% 정도인 최우선변제금도 받을 수 없는 피해자의 채권 평가 금액은 0원에 가깝다.
변호사에게 상담을 받아도 “한 푼도 돌려받지 못하고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대답을 들을 뿐이다. 채권 평가가 어렵다는 정부 주장은 ‘일하기 싫다’를 정중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어렵고, 돈이 없어서 일을 못하겠다’는 무능한 공무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당장 책임있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을 지나고 있는 피해자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금액의 30%는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 ‘선구제 후회수’ 법안은 22대 국회가 시작하자마자 통과되어야 한다. 허위·과장 광고로 이 끔찍한 사태를 만든 정부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아무데나 쓰는 게 아니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