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⑫ 선거제·연금개혁 공론조사 기획한 김석호 서울대 교수

“국민 대표 국회, 국민 뜻 무시·외면…대의민주주의 한계”

2024-06-10 13:00:01 게재

잘 모르는 사안 묻는 여론조사 불완전 … 학습 토론 통한 ‘완전한 여론’ 확인

20년 동안 못한 연금개혁, 공론조사에 맡겨놓고 제 입맛 안 맞는다고 수용 안 해

토론과정 공개로 국민 수용성 높여 … 국회는 공론조사 ‘실험’ 스스로 걷어차

세계는 공론조사 중, 이라크 전쟁 중단에 영향 … 몽골의회, 1천명에 ‘개헌’ 맡겨

공론조사는 대통령, 지자체, 국회 등 갈등관계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만능 열쇠’일까, 국민 대표로 뽑힌 500명이나 1000명이 숙의를 통해 얻어낸 결론이 ‘국민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해와 올해 국회 주도로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과 연금 개혁 공론조사는 ‘새로운 정치 실험’이었다. 하지만 국회는 스스로 공론조사를 요구했으면서 스스로 걷어 차버려 ‘사실상 실패’로 기록되게 만들었다.

두 공론조사 설계와 토론에 참여했던 서울대 전 사회발전연구소장인 김석호 사회학과 교수는 공론조사가 대의민주주의와 여론조사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김 교수는 투명한 자료와 토론과정 공개로 국민들의 수용성과 정책 일관성을 높이고 국민 시민성도 확대할 수 있다고 봤다. 다만 의제 설정이나 조사결과에 대한 수용 여부가 정략적으로 결정될 수 있어 공론화위원회를 통해 객관성을 확보하고 특히 청년세대의 시민성을 확대해 미래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22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회의실에서 이뤄졌다.

■공론조사는 법원의 배심원제와 비슷한 구조인가.

국민을 대표할 사람들을 뽑아서 논의해 결정을 낸다는 점에서는 배심원제 성격을 갖고 있다. 정책 결정자 입장에서 보면 국민을 대표하는 일종의 표본 집단이 충분히 학습하고 토론해서 낸 결과는 신뢰할 만한 자료가 된다. 다만 공론조사로 뭔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오해다. 또다른 오해는 대안 A와 대안 B 중에서 어느 한 쪽 손을 들어준다는 점이다. 국민의 생각, 국민이 원하는 방향이 뭔지를 얻는 것이 핵심이다.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는 건가.

기존 제도엔 2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대의민주주의의 문제다. 국회의원들이 공론조사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느꼈다. 처음엔 공론조사에 대한 무지 내지는 무관심 또는 생소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미 당의 입장이 정해져 있었던 게 원인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국민의 의견에 관심이 없다는 부분을 발견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정치 엘리트들과 일반 국민들이 사는 세계가 다르고 입장이 다르고 그래서 잘 대표하지 못하는 경향도 있다.

■국민들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또다른 부분은 무엇인가.

여론조사다. 여론조사 전화를 받아보면 그동안 생각해 보지 않은 질문을 받게 된다. 누구를 지지하느냐 좋아하느냐, 정부를 신뢰하느냐, 지역현안 중 무엇이 문제라고 생각하느냐 등을 묻는다. 충분히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 질문을 받았을 때 생각하기 시작한 것들이다.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반 국민들의 의견을 한 문항당 10초나 20초 고민하고 답변하는 게 국민의 의견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이것을 ‘불완전 여론’이라고 한다.

통일 문제나 북한에 대한 태도는 꾸준히 노출돼 있는 문제지만 신고리 원전 5, 6호기 재가동 문제는 생뚱맞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신고리 5, 6호기 원전 건설을 재개해야 되겠느냐, 중단해야 되겠느냐’고 물었는데 첫 답은 ‘신고리 5호기, 6호기가 뭐냐’는 거였다. 이것을 ‘불완전 여론’이라고 한다.(김 교수는 신고리 5, 6호기 재개 공론화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래서 신뢰할 만한, 조금 더 완전한 의견을 만들어야 된다. 특정 사안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토론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도 들어보면 의견이 달라지기도 하고 기존 입장이 더 굳어지기도 한다. 그 후 이뤄진 여론조사는 불안전성을 어느 정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더 ‘완전한 여론’이 된다.

■지난해 진행한 국회의원 선거제도 공론조사의 경우 토론 전과 후에 의견이 많이 달라졌다.

많은 국민들은 지역구 의원 줄여라, 비례대표 없애라고 한다. 하지만 국회의원의 대표성, 비례성, 책임성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한 이후엔 ‘국회의원 수를 늘려야 한다’로 바뀌었다. 1987년에 300명이었던 국회의원 수가 지금도 그대로인데 예산은 수십조원에서 600조원대로 늘었다. 토론을 하면서 의원수를 늘려 한 명당 감당해야 하는 예산의 규모를 줄여주면 더 좀 자세히 볼 수 있지 않겠냐, 의원수를 줄이면 오히려 파벌정치에 의해 더 쉽게 장악될 수 있고 의원 한 명이 감당해야 되는 예산은 더 늘어나는 등 권한과 힘을 더 키워주게 되는 것 아니냐는 쪽으로 갔다. 그래서 숙의된 국민들의 의견은 국회의원 수를 좀 더 늘렸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나온 거다.

지역구 의원은 국민 전체가 아닌 지역을 대표하는 이해관계로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불필요한 SOC 예산 등을 낭비하고 있다는 판단에 국회의원을 늘릴 때는 비례대표를 늘리자는 의견이 많이 나왔다.

■학습 토론을 거친 국민의 여론과 그렇지 않은 국민의 여론이 다르다. 어느 게 진짜인가. 실제 국민들을 동일한 환경에 노출시키면 같은 결과가 나올까.

한 달 정도 토론과 학습을 통해서 만들어진 결과는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이었다. 학습하지 않은 대부분의 국민 의견과는 분명 달랐다.

‘미니 퍼블릭’이 가지고 있는 딜레마이기도 하다. 가상으로 국민을 대표하는 500명이 학습과 토론을 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가 전체 국민이 토론을 하고 고민을 하면 도출할 수 있는 결과와 가장 유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게 공론조사다. 대의민주주의와 불완전한 여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아이디어 중 하나다. 이렇게 전 세계에서 정치 실험을 하고 있는 거다.

■연금개혁 역시 결국 21대 국회에서 실패했다.

20년 동안 못한 것을 공론조사에 맡겨놓고 민주당이 됐든 국민의힘이 됐든 정부 부처가 됐든 자기 입맛에 안 맞는다고 수용하지 않는 것은 창피함을 모르고 염치가 없는 행위다. 국회는 국민의 대표로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어야 했다. 정부는 자신들의 결정 프로세스를 스스로 진행했어야 했다. 연금 관련한 자료들도 정부가 국회에 이미 제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작동되지 않았다.

■공론조사 결과를 의미 있게 받아들인 사례들도 있나.

국가 차원에서 제일 유명한 공론조사는 이라크 전쟁이다. 2001년 9.11테러 이후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국민들이 의견을 묻는 공론조사가 텍사스에서 시작했다. 모든 과정이 국민들에게 공유됐고 결과가 공개됐다. 결국 전쟁의 강도나 전쟁 종료에 대한 강력한 의견이 나왔고 정부는 참고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일본은 발전소나 댐 건설 등 지역 문제, 미국은 핵 관련 시설 등 찬반이 갈리는 민감한 문제들을 공론조사에서 다뤘다. 몽골은 ‘개헌’에 대해 공론조사를 했다. 의회에서 직접 국민대표 1000명을 뽑아 합숙시키고 교황을 뽑는 콘클라베식으로 결론이 나올 때까지 토론하고 논의해서 결국 개헌을 해냈다. 중국도 공론조사를 많이 한다. 핵 발전소나 환경 문제 등 지역문제를 많이 다룬다. 공산당이 주도하는 것이긴 하겠지만 나름대로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 공론조사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사용 후 핵연료, 신고리 5· 6호기 건설 재개 공론화위원회 이후 지방자치단체와 중앙정부 기재부까지도 주민참여 예산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1년에 500억원 정도의 용처를 공론조사로 결정하고 있다.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법으로 공론조사를 하도록 하고 있다. 또 중앙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골치 아픈 문제,

예를 들자면 제주도의 경우 영리병원, 대전은 월평공원 개발, 광주는 도심 철도 건설 문제 등 거의 모든 광역시에서 공론조사를 시도했다. 안 한 데가 없을 정도다. 경기도는 이재명 지사때 기본 소득과 기본 주택 등에 대해 공론조사를 했다.

우리나라 공론조사는 대부분 갈등해소용이다. 갈등이 첨예해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하든 정치적인 논란이 일고 (정책결정권자가) 정치적으로 손해를 볼 수 있는 사안을 공론조사 의제로 삼는 거다. 나쁘게 말하면 떠넘기는 거다. 감당할 수 없는 사안들에 대해서 결정을 하면 책임을 지기 어려우니까 그 책임을 국민들에게 전가하는 형식이 많다.

■의제 설정부터 정치적 고려나 편향이 들어간다는 건가.

당연하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국가기구가 필요하다. 중앙의 공론화위원회를 상설화해 의제 선정 기능을 두고 국가 미래와 관련한 이슈를 계속 발굴해야 한다.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치인의 이해관계가 투영된 게 아니라 시스템 안에서 절차를 거치도록 제도화하고 그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이나 수요 내지는 욕구가 반영되도록 짜는 거다.

■공론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국민적 수용성이다. 의제 선정부터 토론, 결과 도출, 정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최대한 국민들과 같이 호흡해야 한다. 독일이 원전 프리 사회로 선언하는 데 40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핵 제로 사회로 나가야 될 것인가’에 대해 국민들과 언론과 정치인들이 지겹도록 노출됐다. 국가적 사안에 대해 국민들이 다 알고 있어야 되고 그 논의 과정을 보고 있어야 한다. 모든 공론조사 기관과 주체들에 요구하는 게 2가지다. 하나는 보고서 등 모든 자료 공개, 둘째는 방송 유튜브 페이스북 등을 통한 생중계다. 국회의원 선거제도 역시 공론조사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됐고 자료도 모두 공개해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그러자 국민들이 높은 관심을 보이며 의견을 많이 개진했다. 그러면 도출된 결과에 대한 국민적 수용성이 높아진다.

■국회에서 2번의 공론조사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다. 민의를 대변할 용기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토론과 열린 정치를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우리나라 정치의 수준이 미달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선거법 문제에는 당론이 없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이해관계가 중심이 됐다. 공론조사 과정에서 만난 굉장히 민주적이고 대중적으로도 열린 소통을 하는 정치인들조차도 결국 자신의 공천권, 당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방향의 제도를 선호하고 그쪽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공론조사나 토론 결과의 일부만 쏙 빼 ‘이게 민의 아니냐’고 하더라.

국회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서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곳이다. 자신의 것을 계속 주장만 해선 안 된다. 국회의원들을 만나보면 모두 똑똑하고 정보도 많지만 과연 민주주의적 소양을 제대로 갖추고 있느냐를 보면 일반 국민들 수준에 못 미치는 것 같다.(국가공론화위원회가 필요한 이유와 청년들의 높은 시민성에 대한 이야기는 내일신문 홈페이지 www.naeil.com에서 볼 수 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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