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중산층, 삶의 질 저하에 극우 선회
르몽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적 고통 겪지만 사회적 도움 받지 못한다 느껴”
이달 6~9일(현지시각)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이 31.4% 득표율로 제1당을 차지했다. 그러자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조기총선을 선언했다. 이달 말과 다음달 초 두차례에 걸쳐 총선이 치러진다.
여론조사에서 집권당의 지지율이 뒤처지자 마크롱 대통령은 24일 “극우가 총선에서 승리하면 내전이 벌어질 위험이 있다”고까지 주장하며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집권당이 조기총선에서 다시 승리하려면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중산층을 잡아야 한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급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중산층의 마음이 극우로 돌아선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25일 “중산층 유권자들은 유럽의회 선거에서 일부는 기권으로, 또 다른 다수는 국민연합에 찬성하는 투표를 통해 분노를 표출했다”며 프랑스 중산층들이 처한 여러 상황을 전했다.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지방 교외마을 플루프라강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는 이본 르 플로빅은 르몽드에 “우리에게 극우 국민연합의 승리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며 “우리는 선거결과를 확신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고 있다. 더 이상 사회적 제도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지역은 2021년 평균 연소득이 2만3010유로(약 3400만원)로 그해 전국 평균(2만3160유로)과 거의 동일한 프랑스의 평범한 지역이다. 2020년 마을 인구의 1/4이 은퇴자였다.
노동인구 중 20%는 블루칼라, 30%는 화이트칼라, 30%는 전문직, 13%는 임원이었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정치적 극단주의 세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탈산업화나 실업으로 인한 불안과도 거리가 먼 브르타뉴 중심부 지역이다.
하지만 이달 초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에서 국민연합의 조르당 바르델라 후보는 이 지역에서 28.21%의 득표율로 1위에 올랐다. 2019년 선거만 해도 에마뉘엘 마크롱이 이끄는 중도 성향 르네상스당이 선두를 달렸고,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 대표는 19% 득표에 그친 바 있다.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중산층 타격 커
프랑스 여론조사기관 ‘오피니언웨이’ 분석에 따르면 프랑스 전역에서 월 소득 1000~2000유로(약 150만~300만원)인 가구의 41%, 2000~3500유로(300만~520만원)인 가구의 33%가 국민연합 바르델라 후보에게 투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연합은 지난 선거 대비 이번 선거에서 화이트칼라층에서 10%p를, 전문직으로부터 15%p를 더 얻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면서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확실성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경제관측연구소(OFCE)의 분석·예측 담당 부소장 마티유 플레인은 “40년 동안 이렇게 물가가 오른 적이 없었다. 그 당시에는 모든 임금이 물가에 연동돼 있었다”며 “그같은 보호장치 없이 인플레이션 위기를 경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남부 해안에 사는 56세 엘리자베스는 “중산층이 치솟는 물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제도에서도 제외되면서 소비패턴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프랑스 식료품 가격은 지난 2년 동안 20%, 전기료는 지난 5년 동안 70% 상승했다. 그는 “수년 전부터 쇼핑할 때 1유로 지폐까지 세는 습관이 생겼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계산기를 들고서 쇼핑몰을 둘러보는 남성들도 많다. 수입과 지출이 빠듯해 휴가를 가거나 저축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교외 및 농촌지역 주민들은 도시민보다 더 큰 불이익을 받았다. OFCE에 따르면 물가상승이 절정에 달했을 때,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들보다 평균 생활비 상승률이 3%p 더 높았다. 도심의 경우 임대료가 더 높지만 교외 및 농촌지역 주민들은 자가용 의존도가 더 높아 교통비가 많이 들었다. 또 대부분 단독주택 형태라 난방에 더 많이 지출해야 했다.
경제적 압박에 시달리는 가정들은 고정비, 예를 들면 전기료와 연료비 보험료 식비 등을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시간제 교사로 일하며 아이를 키우는 50세 안은 “요즘은 레스토랑도 가지 않고, 오페라는커녕 영화관에도 거의 가지 않는다. 옷은 중고로 산다. 하지만 매달 15일부터 계좌가 텅텅 빈다”고 말했다.
중산층이라는 환상 깨진 것도 한몫
인플레이션 위기로 인해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사람들도 있다. 프랑스 가족협회연합(UDAF) 중부지부 재정고문인 라에티티아 비네론은 “전에는 우리 사무실에 들를 일이 없었던 중산층들이 이제는 재무적 조언을 위해 찾아온다”며 “주택담보대출이나 자동차대출을 받은 직장인들”이라고 말했다.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프랑스중앙은행에 접수된 과다채무 사례는 지난해 대비 6% 증가했다. UDAF 동남부지부 재정고문인 셀린 라스카녜르는 “식료품 가격이 치솟으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임대료와 보험료, 전기료 등 일상적인 지출에 따른 부채만으로 과다채무자에 오른 사례를 접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계층인 중산층들에게 삶의 추락이란 생활수준에서만 느껴지는 건 아니다. 상징적인 의미도 있다. 교사 안은 “내 머릿속에는 중상류층에 속하는 교사가 한달에 두세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여행을 즐기고, 문화생활을 위한 여가활동을 하고, 노후를 위한 작은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나의 삶은 격이 떨어졌다. 많은 동료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44세 특수교육 교사 오드리는 월급과 상여금, 이혼수당을 합쳐 한달에 2100유로(약 312만원)를 번다. 아들과 함께 생활하는 그는 “학업수준과 직업적 책임에 비해 부족한 급여, 아들을 사립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다는 사실, 일의 가치 상실과 사회적 지위상승 기회의 부재 등으로 사회적으로 격하됐다는 감정을 느낀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격하된 느낌은 때때로 이전세대의 삶과 비교되기 때문이다.엔지니어 공무원으로 일하는 팀은 “부모님보다 잘살지 못한다”고 한탄한다. 게다가 그는 자식들이 자신보다 더 못사는 불행을 겪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는 “검소한 생활방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녀들에게 내가 받았던 수준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저축하고 자금을 조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나는 부모님만큼 잘살지 못하고 있으며, 계속 하향추세”라고 말했다.
파리7대학의 사회학 교수 니콜라스 뒤부는 “미래전망이 사라지고 삶의 상승궤도를 그리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면서 중산층이라는 환상이 깨졌다”며 “이러한 현실인식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고용불안이 일상화되고 있다”며 “고용불안은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삶을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사회의 구조를 갉아먹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으로 격하됐다는 느낌
이같이 불안정한 상황에 직면한 젊은이들은 자신이 자랐고 앞으로도 살고 싶은 도시에서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다. 보르도 출신으로 비영리부문에서 일하는 35세 앙투안은 40㎡(약 12.1평) 규모의 아파트를 구입하길 원한다. 하지만 그는 “최저임금 수준의 월급만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파리에서 아내, 두 자녀와 사는 35세 패트릭도 큰 집으로 이사하고 싶지만 언감생심이다. 그는 “엔지니어인 우리 부부에게 방이 3개인 아파트를 구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회주택도 부부의 벌이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우리는 1960년대 노동자계급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 제롬 푸르케는 “중산층에게 있어 자신의 아래에는 복지수혜자인 극빈층이 있고 자기들 위에는 스스로를 배불리는 부자들이 있다. 중산층은 사회의 도움을 받기에는 너무 부유하고, 근근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가난하다. 중산층들은 자신들이 혜택을 볼 수 없는 사회적 모델을 위해 세금을 내고 있다고 느낀다. 세금을 내면 그 대가로 그만큼의 가치를 누린다는 암묵적인 사회적 협약이 깨졌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