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수감 전 말레이 총리, 가택연금 전환 실패
고등법원, 왕실명령 주장 기각
12년형 선고, 복역중 6년 감형
6조원대 부패 스캔들로 수감 중인 나집 라작 전 말레이시아 총리가 자신의 남은 형기를 교도소가 아닌 가택연금 상태로 전환해달라는 신청을 냈지만, 법원이 기각해 수포로 돌아갔다.
더 스타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라작 전 총리는 지난 4월 초, 압둘라 술찬 아마드 샤 제16대 국왕이 가택 연금 상태에서 형기를 마칠 수 있도록 한 명령을 내렸다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자들의 진술서를 제출했지만 쿠알라룸푸르 고등법원은 3일 “나집의 신청에 대해 심리 검토에 들어갈 논거가 없다”며 기각했다.
고등법원은 라작이 이끌던 여당연합 국민전선(BN) 관계자와 전 부총리 등의 진술서 내용이 압둘라 전 국왕이 정부에 보낸 추가 명령서에 관한 소문을 단순히 전해들은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각 이유로 명시했다.
나집 전 총리측 변호사는 법원의 결정에 항소할 계획이라고 밝혔지만 상황이 바뀔지는 미지수다.
말레이시아는 9개 주 최고통치자가 서로 돌아가면서 5년 임기 국왕직을 맡는 시스템으로 현 국왕은 조호주 술탄 출신인 이브라힘 알마훔 이스칸다르가 올 1월 17일부터 제 17대 국왕을 맡고 있다. 압둘라 전 국왕은 이브라힘의 전임자다.
국왕은 국가 통합의 상징적 존재지만, 최근 정치적 혼란이 이어지면서 역할이 확대돼 왔다. 이브라힘 현 국왕은 4월 초 부패척결을 선포하면서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사정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나집 전 총리의 국민전선(BN)은 195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61년간 집권했으나, 지난 2018년 14대 총선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장기 집권에 따른 부정부패가 민심 이반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부패 척결을 내세운 개혁파 정당 연합인 희망연대(PH)가 사상 첫 정권 교체에 성공했고, 나집 전 총리는 퇴임 뒤 7건의 부패 혐의로 구속·기소돼 12년형이 선고됐다. 이른바 ‘1MDB 스캔들’이다. 1MDB는 그가 총리 재직 당시 경제개발 사업을 하겠다며 설립한 국영투자기업이다. 나집과 측근들은 이 회사를 통해 총 45억달러(5조9600억원)를 유용한 혐의를 받았다. 수사팀은 유용 자금 중 7억달러(9271억원) 이상이 나집 전 총리 계좌로 흘러들어갔다고 주장했다.
나집 전 총리는 지난 2022년 8월 형이 확정돼 구속된 직후 압둘라 당시 왕실에 사면을 요청했다. 그의 부인 로스마 만소르도 관련 혐의로 징역 10년과 벌금 9억7000만링깃(2579억원)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말레이시아 사면위원회는 올 2월 초 나집 전 총리 형량을 12년에서 6년으로, 벌금은 2억1000만링깃(589억원)에서 5000만링깃(140억원)으로 대폭 줄였다. 사면위원회는 국왕이 의장을 맡고 있는데, 나집에 대한 형량 감경은 17대 이브라힘 국왕이 아닌 전임 압둘라 국왕체제에서 내려졌다.
한편, 안와르 이브라힘 현 총리의 여당연합 PH는 2022년 총선에서도 승리했으나 과반 의석 확보에는 실패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