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 ‘무능한 보수’ 표로 심판
노동당 압승으로 14년만에 정권 교체 예상 … 고물가·공공의료 악화에 분노
AP통신은 출구조사 직후 “보수당에 대한 분노 속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노동당 압승이 예고됐다”고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불과 5년전 유권자들은 노동당에게 최악의 패배를 안겨줬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노동당이 가장 큰 승리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면서 “유권자들은 혼란스럽게 통치한 보수당을 무자비하게 처벌했다”고 평가했다.
영국은 지난 2016년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이후 유럽연합(EU)과 오랜 협상을 거치며 혼란을 겪어왔다. 이후에도 코로나19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물가는 급등했고 재정 압박 속에 공공서비스는 악화됐으며 이주민은 사상 최다로 급증했다.
지난 5월 말 영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3%가 영국의 현재 상태가 2010년보다 나쁘다고 답했다. 악화됐다고 보는 분야 가운데 특히 생계비용(85%), 공공의료인 국민보건서비스(NHS·84%), 이민 제도(78%), 경제(78%), 주거(72%), 치안(71%) 등에 대한 불만이 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지난 5월 수낵 총리가 7월 4일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극적 반전 없이 실패로 끝났다.
총선 민심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경제와 물가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의 경제 성장률은 주요 7개국(G7) 가운데 중간 정도지만, 코로나19 이후 회복 속도가 더뎠다. 2019년 말 대비 영국 경제는 1.8% 성장해 G7 중 두 번째로 낮았다.
특히 서민들은 생활물가 급등으로 신음했다. 2022년 10월 물가 상승률이 연 11.1%에 이르렀고 기준금리는 16년 만의 최대 수준인 연 5.25%로 유지되고 있다. 최근 들어 물가 상승이 둔화했으나 식품 가격은 2022년 초보다 여전히 25% 높은 수준이다. 수낵 총리가 선거 기간 “보수당은 감세하고 노동당은 증세할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지만 먹혀들지 않았다.
이미 보수당 집권 기간 조세 부담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공공서비스의 질이 악화된 것도 민심을 자극했다.
보수당 정부는 공공 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공 지출 삭감에 나섰고, 그 결과 가장 큰 위기에 닥친 것은 공공의료인 국민보건서비스(NHS)다. 응급치료부터 진료, 진단, 수술까지 긴 대기시간으로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고질적인 인력·자원 부족이 코로나19 사태 이후 급격히 악화해 병원 진료에 대기중인 환자가 750만명에 이른다. 한 조사에서 NHS에 만족한다는 응답률은 24%로, 2020년보다 29%포인트 급락했다.
여기에 이민도 영국인들의 불만을 높인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합법 이주민이 늘면서 영국으로의 이민 순유입은 2019년 18만4000명에서 2022년 74만5000명으로 급증해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2023년에는 68만5000명으로 다소 줄었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여기에 불법 이주민까지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면서 영국인들의 불만을 더욱 키웠다.
아울러 영국 보수진영의 혼선과 무능, 비리까지 겹쳤다. 2016년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보수당 정부는 브렉시트를 국민투표에 부치고 EU 잔류 진영을 이끌었지만 패배했다.
이후 출범한 테리사 메이, 보리스 존슨 정부는 EU와의 브렉시트 협상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끌어오는 데 집중했으나 협상은 순탄치 않았고 당내 분열도 극심했다. 더군다나 코로나19 봉쇄 기간 국민은 고통받는데 총리실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존슨 전 총리가 거짓말까지 했다는 이른바 ‘파티 게이트’가 터졌다.
이어 등장한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대규모 감세 정책을 내놓았다가 혼란만 촉발하며 취임 49일 만에 사임해 ‘양배추 총리’라는 별칭을 얻었다.
다시 ‘40대 기수’이자 첫 인도계인 리시 수낵 총리가 2022년 10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등장했으나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조기 총선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유고브의 5월 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2010년 이후 보수당 정부가 해온 국정 운영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2019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찍은 응답자마저 지지하지 않는다는 비율이 47%에 달했다.
세라 B 호볼트 런던정경대 교수는 “파티게이트, 트러스 총리 단명, 물가급등, NHS, 생활비 위기, 미미한 브렉시트 혜택, 높은 수준의 이주민 유입 등 일련의 ‘능력 쇼크’(competence shock)로 보수당이 노동당에 대해 가졌던 우위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정재철 기자 jcju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