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 못 넘은 ‘민주시민교육법’, 쟁점은 ‘독립성·중립성’
민주시민교육 주관 주체를 두고 행안부냐, 국회냐, 선관위냐
50여개 조례로 운영, 법적 근거 미비 … 97년 이후 15번 발의
필요성엔 모두 공감 … “시민단체 참여한 독일사례 참고할 만”
민주시민 교육을 지원하는 법안이 다시 발의되면서 1997년 이후 매번 실패한 법제화 시도가 성과를 거둘지 주목된다. 지방자치단체는 50여개의 조례를 제정해 민주시민교육을 운영하고 있지만 사실상 법적 근거가 없는 상태다.
16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한병도 의원은 지난달 ‘민주시민교육지원법 제정안’을 내놨다. 21대에 제출된 법안이지만 이 법안은 상정조차 되지 않은 채 폐기되는 등 제대로 논의되지 않았다.
한 의원은 “현재 사회 각 영역에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민주시민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고 지방자치단체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지만 이에 관한 법적 근거가 미흡해 체계적인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며 “평생교육법상 평생교육에 ‘시민참여교육’이 포함되어 있지만 ‘시민참여교육’이 평생교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인 0.1%에 불과하고 사회 각 영역에서 특정 분야에 대한 교육과 진흥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돼 통일교육 지원법(1999년), 문화예술교육 지원법(2005년), 법교육지원법(2008년), 경제교육지원법(2009년), 인성교육진흥법(2015년) 등 관련 입법이 이뤄졌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으로서 국민주권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국가 운영의 기본원리임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다”며 “헌법적 가치에 기초하여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육기본법’에 명시되었듯이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적 가치관과 태도 등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과 역량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시민교육은 일상생활의 각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데 필요한 자질과 역량을 기르는 교육으로 선거·정치교육뿐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공동의 문제해결에 함께하는 공동체의식, 민주시민으로서의 소통능력, 허위·조작정보 판별능력 등을 기르기 위한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지역사회에 대한 이해와 참여, 주민자치의 강화와 내실 있는 자치분권을 달성하는 등 풀뿌리 민주주의 구축에 기여할 것이며 사회적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 제정안은 민주시민교육의 활성화를 위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행정적, 재정적 지원을 하도록 규정해 지원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 또 행안부장관 소속 민주시민교육위원회를 둬 민주시민교육의 실시와 지원 등을 담은 기본계획을 3년 단위로 수립하고 행안부장관과 시도지사가 매년 민주시민교육계획을 수립해 시행하고 결과보고서를 공개하도록 했다. 광역뿐만 아니라 기초지자체장도 민주시민교육위원회를 두고 풀뿌리 민주교육이 가능토록 만든 점도 특징이다. 민주시민교육원 설립과 지역민주시민교육센터 설치 계획도 들어가 있다.
21대 국회에서 행안위 전문위원실은 검토보고서를 통해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한 법제화 시도는 1997년부터 시작돼 제20대국회까지 총 10건이 발의됐고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고 했다. 21대에서는 4개의 관련 법안이 제출됐지만 역시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한 의원이 15번째 법안을 제출한 셈이다.
검토보고서는 “현재 50여개의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조례를 제정해 민주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있는데 중앙부처 차원에서 민주시민교육의 체계적·지속적 지원체계를 마련해 민주시민교육이 원활히 실시될 수 있도록 관련 법률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다”며 “따라서 민주시민교육을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실시·지원하기 위한 민주시민교육지원 법안을 제정할 필요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쟁점은 이념적, 정치적 중립성 확보다. 검토보고서는 “민주시민교육을 어느 기관에서 주관하는 것이 타당할 것인지에 대해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민주시민교육의 이념적·정치적 속성 등의 특수성과 이에 따른 사회적 영향력 등을 고려해보면 국회 또는 독립기관에서 수행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행정안전부가 민주시민교육의 지원을 주관하는 경우 지방자치단체와의 긴밀한 협력 및 주민자치·참여 관점에서 체계적 지원이 가능하고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을 전제로 행정부 또는 국회 소속, 독립기관에서 주관하는 방안을 입법정책적으로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선거관리위원회는 “민주시민교육이 정치적·이념적 중립성에 대해 국민적인 신뢰를 확보하고 있고 민주시민교육을 효과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조직과 경험·전문성을 갖춘 독립적 기관에서 이를 주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국회 도서관은 지난 9일 ‘독일의 민주시민교육 지원 입법례’를 제시하면서 “독일 연방정부는 2022년 12월에 민주시민교육과 관련해 연방 전반에 걸친 재정 지원과 체계적인 정보 제공 등을 위해 ‘민주주의의 증진, 다양성 형성, 극단주의 방지 및 민주시민교육을 위한 조치를 강화하기 위한 법률안’을 마련해 의회에서 논의 중”이라고 소개했다. 독일은 지금까지 법적 규정 없이 시민교육단체와 기관들이 합의한 학생교육 공동지침인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통해 시민사회단체 주체로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해 왔다.
박진애 법률자료조사관은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 참정권 논의와 청소년에 의한 심각한 혐오 표현에 대한 문제의식 등과 관련해 민주시민교육의 중요성이 재조명되어 왔다”며 “민주시민교육을 원활히 실시하기 위해서는 중앙부처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 방안을 담은 민주시민교육 지원법의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했다.
박 조사관은 “국회 회의록을 보면 민주시민교육지원 법안에 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며 “중앙정부 차원에서 민주시민교육의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체계를 마련해 민주시민 교육이 원활히 실시될 수 있도록 민주시민교육 지원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어 “독일의 민주시민교육 지원 법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단체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고 법률안 심의과정에서 보완논의도 지속되고 있다”며 “우리나라가 향후 민주시민교육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원체계를 구축하는 입법을 하는 경우 독일 입법례를 참조할 만하다”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