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생물 다양성 기반 유전자원 연구에 대한 기대
생물이 지닌 유전자는 다양한 유전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다. 지난 수십억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생물이 등장했고 이들은 저마다 지구상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고 진화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유전자가 개발되었고 다양한 변이가 쌓임에 따라 특정한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로 개선되기도 했다.
짧게는 수백만년에서 길게는 수십억년에 이르는 기나긴 시간 동안 개발된 이러한 유전자들은 인류가 변천하는 세상에서 보다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할 귀중한 유전자원이다. 인류가 다른 미생물과 맞서 싸우고 새로운 환경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무기와 방어체계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유전자원을 활용하는 방법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새로운 유용 유전자를 발굴하고 그 산물을 대량생산하는 일이다.
지난 6월 세계적 학술지 ‘세포(Cell)’에 발표된 한 논문이 주목할 만하다. 연구진은 DNA 정보가 고품질로 알려진 미생물 정보를 모두 분석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항생제 후보 물질 86만여개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중 100개를 선정해 시험한 결과 80여개는 실제로 세균막을 망가뜨리는 효과가 있었다.
나머지 후보 물질 86만여개에 대해 그 기능을 검증하는 일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지만 검증에 성공한다면 새로운 항생물질을 수십만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슈퍼 박테리아와 같은 항생제 내성 세균에 대한 걱정을 훨씬 줄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되는 이유다.
한국, 극지연구소 있어 연구여건 좋아
지금까지 연구되지 않은 생물을 더 많이 연구할수록 활용할 수 있는 유전자원의 수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다양한 생물을 확보하고 그 DNA 정보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세계 공동연구를 통해 총 연구기간 10년, 연구비 5조원 가량을 투입해 진행되고 있는 지구생물유전체사업(EBP)이 대표적이다.
이 사업을 통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식물 등의 DNA 정보를 고품질로 확보하게 된다. 이를 통해 생물의 진화를 밝히고 멸종위기종을 보전할 방법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방대한 양의 새로운 유전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새로운 항생제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식물이 지니고 있을 새로운 약효물질 신약 후보를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환경조건을 지닌 극지를 포함해 연구가 덜 된 지역에 서식하는 생물은 이러한 다양성 연구의 핵심이 된다. 극한의 추위를 버티고 짧은 시간에 빠르게 성장해야 하는 극지생물은 저마다 독특한 유전자 조합을 활용해 그 환경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유전자원을 발굴해 온 변화 및 추위에 견디는 요인을 발굴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기후변화로 인해 급속도로 변화하는 환경에 실시간으로 적응하고 진화해가는 생물을 연구함으로써 환경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유전요인을 밝혀낼 수도 있다.
한국은 이런 극지생물을 연구하는 데 있어 다른 여느 나라보다 강점을 지니고 있다. 다산과학기지 세종과학기지 등을 운영하며 빼어난 연구를 수행하는 극지연구소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극지생물 연구의 일환으로 이유경 박사 연구진과 함께 북극 스발바르 지역의 식물 DNA를 연구한 논문을 최근 발표했다. 우리는 13종 극지식물의 DNA 정보를 수집해 이중 나도수영과 그린란드고추냉이에 대해서는 DNA 정보를 고품질로 정리한 유전체 지도 또한 작성했다. 이 두종은 30억 염기쌍인 사람 유전체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유전체를 지니고 있었고, 유전자는 사람과 비슷한 수준인 3만여개씩 확보됐다. 비타민 합성을 비롯한 다양한 생체 분자 합성에 활용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연구비 여건상 이번 연구에서는 나머지 식물 11종의 고품질 유전체 지도를 확보하지는 못했지만 추후 연구에서 이를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진화와 보전 연구부터 산업동력 확보까지
기후변화가 심각해짐에 따라 생물 다양성이 더욱 더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핵심역량을 한국에서 선도적으로 갖춰나가길 기대한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주도하는 디지털바이오와 바이오파운드리 연구는 그 핵심역량 달성에 기여할 것이다. 디지털바이오 기반을 활용해 멸종위기에 닥친 생물, 유용 생체 분자를 지닌 생물의 유전자원을 빠르게 확보하고 바이오파운드리를 활용해 이를 효과적으로 대량 합성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길 바란다. 생물 다양성 연구가 진화와 보전에 이어 새로운 산업동력 확보까지 이르게 되길 기대한다.
김 준 충남대 생명시스템과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