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 최고 민주국 말레이시아, 반도체산업에 매진

2024-08-02 13:00:03 게재

미국의 대중국 압박 기회로 활용 … 세계 6위 반도체 수출국 지키려 대대적 투자

안와르 이브라힘 수상이 취임한 2022년 11월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안와르 수상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아세안의 미래지도자로 꼽혔지만, 외환위기 이후 마하티르 수상의 정치적 탄압을 받아가면서 말레이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다.

그가 오랜 기간 잠재적 리더에서 현실의 집권자가 되면서 국제사회에서 말레이시아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를 발행하는 영국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말레이시아의 민주화지수가 2023년 7.29점으로 세계 167국 중 40위라고 밝히고 있다. 필리핀 53위, 싱가포르 69위, 태국 63위 등 주요 아세안 국가가 모두 말레이시아보다 더 낮은 민주화 수준을 보인다. EIU의 민주화 지수는 선거절차와 다원성 등 다수의 항목을 조사하여 10점 만점으로 점수를 산정한다.

말레이시아가 종교적 계율이 상대적으로 강한 이슬람 국가이자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인구가 정립하고 있어, 정치적 다원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국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말레이시아의 민주화 수준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안와르 정부가 경제적으로 과거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다면 말레이시아는 명실상부한 아세안의 중심국이 될 것이다.

◆2022년 8.7% 성장률 2023년 3.7%로 = 코로나 악령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22년 말레이시아의 성장률은 8.7%에 달했는데 이는 기저효과 때문이라고는 할 수 있었다. 2023년 성장률은 3.7%로 대폭 낮아졌다. 말레이시아가 대외의존도가 높아 경제성과가 해외 여건에 큰 영향을 받고, 또 안와르 정부가 국론이 양분된 상황에서 출범했기 때문에 경기악화를 정부의 탓으로만 돌리기도 어렵다. 그래도 3.7%는 연이은 쿠데타와 정정불안으로 경제적 역동성을 상실한 태국을 제외하면 주요 아세안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성장률이었다.

그 결과 취임 직후 실시 된 여론조사에서 68%에 이르렀던 안와르 수상의 지지율은 2023년 12월에는 50%로 낮아졌다. 국민 80%는 경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안와르 정부가 경제 문제를 잘 다루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지난해 저성장의 주요 원인은 수출 부진이었다. 링깃화 기준 수출은 1조 4256억 링깃이었는데 2022년의 1조 5500억 링깃에 비해 명목 기준으로 8% 정도 감소했다. 공산품 수출은 1조 2169억 링깃으로 6.7% 감소했다. 링깃화의 가치 하락을 고려하면 달러 기준으로 수출은 더 많이 감소했다. 특히 천연자원을 가공하는 석유정제품, 화학, 고무제품, 팜오일 가공품 등의 수출이 부진했는데 이는 이들의 국제가격 하락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지난 5월 28일 개최된 ‘동남아 반도체 2024(Semicon Southeast Asia 2024)’에서 야심찬 말레이시아 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들어 경기 회복세 보여 = 안와르나 말레이시아 국민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올해 경기가 다소 회복되고 있다. 1/4분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4.2% 성장했는데 2023년 2/4분기 이후 모든 분기별 성장률보다는 더 높았다. 2/4분기 성장률은 5.8%라고 정부는 추정하고 있다. 이는 2022년 4/4분기 성장률 7.4% 이후 가장 높아 말레이시아 경제의 회복세가 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출도 미약하나마 증가하고 있다. 5월말 누계 총수출은 6053억 링깃으로 2023년 동기의 5793억 링깃에 비해 4.5% 증가했고 공산품 수출도 역시 4.5% 증가했다. 적어도 수출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가 2023년에 비해서는 크게 높아졌다. 자세한 통계가 발표되지는 않았으나, 뉴스보도에 의하면 6월에도 수출증가세는 계속되었고 상반기 전체로는 지난해 상반기에 비해 3.9% 증가한 7311억 링깃에 이르렀다고 한다. 반도체 관련 제품과 팜오일 가공제품의 수출증가세가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난다.

말레이시아의 수출성과는 반도체 수출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빈도체 산업은 197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 기업의 투자로 시작했다.

페낭주를 중심으로 세계 유수의 반도체 업체들이 입주하여 말레이시아는 세계 전자산업 공급망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재 말레이시아는 반도체의 가치사슬에서 세계 테스트 및 패키징의 13%를 담당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1980년대에는 일본기업이 가정용 전자 제품 생산을 시작했고, 반도체를 중심으로 전기전자 산업의 클러스트가 형성되었다.

1차 산품 기반의 농가공산업, 석유정제 및 화학산업 등 산업구조 다각화를 추진해 왔지만, 전기전자와 반도체는 2010년 전체 공산품 수출에서 51.0% 및 20.0%에 이를 정도였고, 2023년에는 47.3%와 31.8%가 되었다.

◆말레이, 중국 베트남 맞서 반도체로 승부 = 그렇다고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반도체 수출이 세계경기의 영향을 받아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수출액은 3876억 링깃으로 2022년의 3873억 링깃에서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달러 기준으로는 2022년 786억 달러에서 2023년 748억 달러로 감소했다. 올해도 5월 누계로 수출은 1469억 링깃이었는데 이는 2023년 5월 누계 수출 1557억 링깃에 비해 5.7% 하락한 것이다.

전기전자 산업 중에서 가전 부문이 중국과 베트남의 경쟁력 향상으로 말레이시아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어 한때 공산품 수출의 50%를 상회했던 비중은 반도체의 비중 증가에도 불구하고 감소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 상승은 중요하다.

그래도 다른 중요 동아시아 반도체 수출국가와 비교해 보면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의 상황은 더 낫다. 지난해 전자집적회로(HS 8542)를 기준으로 보면 최대 반도체 수출국인 대만의 수출은 9.3% 감소했고, 싱가포르 역시 14.4%, 한국은 1128억 달러에서 861억 달러로 23.7%나 감소했다. 말레이시아의 수출이 4.8% 감소한데 불과했다는 점에서 말레이시아는 선방한 셈이다.

◆안와르, 야심찬 말레이 반도체 전략 발표 =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압박전략은 말레이시아에게 기회가 되었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말레이시아의 위상은 상승했다. 중국 대신 동남아 특히 말레이시아를 대상으로 한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인텔은 70억 달러의 칩 패키징 설비를 건설하기로 했고, 인피니온도 54억 달러를 들여 파워 칩 플랜트를 건설하기로 했다. 모두 기존의 반도체 집적지역인 페낭주에 투자된다. 이 두 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포함해 지난해 페낭주는 128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전 7년 동안의 투자유치액보다 더 많은 것이다.

이러한 투자 붐에 자신감을 얻은 안와르 수상은 지난 5월 28일 개최된 ‘동남아 반도체 2024(Semicon Southeast Asia 2024)’에서 말레이시아 반도체 전략을 발표했다. 목표 시기를 특정하지는 않았지만 1단계에서 집적 회로 설계, 고급 패키징 및 반도체 칩 제조 장비에 대해 5000억 링깃(1070억 달러)의 투자를 유치하여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겠다고 선언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반도체 칩 설계 및 고급 패키징 분야에서 다국적기업이 산업의 생태계를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매출 2.1억 달러에서 10억 달러의 국내기업을 적어도 10개는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매출 2.1억 달러 정도를 달성하는 반도체 관련 기업 100개를 육성하겠다고 말했다. 나아가 말레이시아를 글로벌 반도체 연구개발(R&D) 허브로 만들고, 고급기술을 가진 엔지니어 6만 명을 육성하기로 했다.

◆후공정 중심의 공급망 참여는 약점 = 안와르 수상의 반도체 전략은 말레이시아 반도체 산업 생태계의 약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가진 후공정 중심의 공급망 참여, 국내기업의 미미한 존재감, 취약한 R&D 역량, 고급인력 부족 문제 등이다. 수상은 반도체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 투자유치 외에 250억 링깃(53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지출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수상 자신이 같은 연설에서 밝혔듯이 2024년 한 해에 TSMC가 280억~320억 달러를 투자하는 현실의 반도체 업계에서 말레이시아가 자국 기업 중심의 R&D 허브가 된다는 반도체 강국 꿈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급인력의 확보문제이다. 국내의 낮은 임금 때문에 두뇌유출이 심각한 상황에서 고급인력의 확보문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7월 24일 반도체 산업협회장은 한 회의에서 말레이시아가 세계 6위의 반도체 수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2030년까지 반도체 수출을 1.2조 링깃으로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30만 명의 기술자가 필요하고 국내에서 공부하고 있는 외국 이공계 학생들이라도 붙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레이시아는 한국, 대만 등과 비교해서는 고급 영역은 아니지만, 세계 반도체 생태계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미중간의 갈등 관계 속에서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은 기회를 맞고 있다. 말레이시아가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여 반도체 산업의 고도화를 진행할 것인지는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박번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