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약자보호’의 함정

2024-08-02 13:00:01 게재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최저임금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일하는 대가로 시간당 일정금액 이상을 받도록 법제화해 저임금노동자들도 최소한의 생계수준을 보장받게 한다는 취지다.

그런데 이 제도의 탄생 배경과 역사를 짚어보면 얘기가 복잡해진다. 최저임금제도가 탄생한 것은 1938년 미국 연방정부가 ‘노동자 임금을 시간당 25센트 이상 지급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정노동기준법’을 제정하면서다. ‘저임금노동자 보호’라는 명분이 뚜렷했는데도 확정되기까지 적잖은 진통을 겪었다.

북부 주(州)들이 제도 도입에 앞장선 반면 남부 주들은 대놓고 반대했다. 대립의 한복판에 남부 농장들의 노예 신세에서 해방된 흑인 노동자들이 있었다. 남부지방 기업들이 이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활용해 월등한 가격 경쟁력을 누린다는 게 북부 기업들의 불만이었다. 북부 주들이 내건 ‘저임노동자 보호’라는 명분 이면에 ‘남부기업 견제’라는 속셈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도입된 최저임금제도가 흑인노동자들에게 ‘복음’이었을까. 당장은 수혜를 누리는 듯 했지만 이내 시련이 찾아왔다.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근근이 연명하던 남부 기업들 상당수가 사업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았고, 흑인들의 저임금 일자리가 대거 사라졌다. 1930년대 후반은 대공황이 절정을 치닫던 때였기에 상황이 더 꼬였다.

최저임금 발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약자보호’ 논란

요즘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재연되고 있다. 시간당 15달러였던 최저임금을 지난 3월부터 16달러로 올린 이후 패스트푸드업계가 비용증가분을 소비자와 종업원들에게 전가하면서다. 지역 프랜차이즈 기업들은 매장 종업원들의 근무시간을 평균 10% 단축하는 한편 10%의 가격인상도 병행했다. 그로 인해 고객들의 발길이 줄면서 업계 평균 매출이 3% 이상 뒷걸음질쳤다. 소비자(가격 인상), 종업원(근무시간 축소로 실질임금 하락), 사업자(매출 감소) 등 “모두에게 타격을 안겼다”(영국 가디언,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워싱턴이그재미너)는 언론보도가 이어졌다.

최저임금 발상지에서 벌어지는 논란은 ‘약자보호’ 정책이 얼마든지 취지와 다른 결과를 낼 수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저임금 인상을 놓고 해마다 진통을 되풀이하고 있는 한국의 노사와 정부 관계자들이 참고해야 할 대목이다.

최근 한국 최저임금위원회가 내년 시간당 최저임금을 올해보다 1.7% 오른 1만30원으로 결정한 것을 놓고 노사 양쪽에서 모두 불만과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경영계는 이번 인상으로 “한국의 최저임금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8개국 가운데 8위 수준으로 높아졌다”고 아우성친다. 반면 노동계는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2.6%)에도 못 미치는 인상률”이라며 반발한다.

양쪽 주장이 맞서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2018년 한꺼번에 16.4%나 밀어 올렸던 최저임금 대폭 인상의 여파가 자리잡고 있다. 근근이 사업을 이어왔던 소형 음식점과 편의점 PC방 노래방 등의 사업장 점주들이 종업원을 감원하면서 영세 일자리가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최저임금 대폭인상을 막후 지휘한 청와대 정책실장이 살던 아파트단지에서조차 ‘비용 절감’을 이유로 경비원들을 해고하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실질적 ‘약자보호’ 이끌어낼 치열한 토론 아쉬워

‘약자보호’라는 취지를 온전하게 살리기 위해서는 제도를 실효성 있게 조율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업 환경이 천차만별인 지역·업종 간 최저임금의 구분 적용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노동계 대표권을 틀어쥔 양대노조는 최저임금이 낮게 책정되는 지역과 업종 종사자들에 대한 ‘낙인효과’를 들어 반대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미국 일본 영국 등 많은 나라들이 구분 적용하고 있는 이유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무엇이 실질적인 ‘약자보호’를 이끌어낼 정책인지 이념과 진영을 떠난 진지하고 치열한 토론이 아쉽다.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