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국민의 침묵을 두려워해야 할 이유
일반적으로 한여름은 정치 비시즌이지만 올해는 조금 다르다. 거대 양당이 전당대회를 열고 새 대표를 뽑았거나 뽑는 정치이벤트를 진행 중이어서다. 게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야당은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고, 여당이 필리버스터로 막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소란스러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은 정치판에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막가파식 인사’를 되풀이하건 말건, 국민의힘 한동훈 체제가 어떻게 정비되건,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이 충돌하건 않건 관심 밖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일방적 국회운영에도, 탄핵을 밥 먹듯 해도 목울대를 세우는 이도 없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고 김대중 대통령 기일인 8월 18일 열린다는 사실을 아는 국민도 드물다. 하다못해 택시기사들조차 정치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다 꼴보기 싫다”가 현재의 정치민심인 셈이다.
2016년 여름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라는데
정당 골수 지지층을 제외한 다수 국민을 이처럼 정치무관심층으로 돌려세운 것은 윤 대통령의 무능과 오만, 정치를 포기한 여야의 무한정쟁이다. 특히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정치의 본령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나라는 효율적으로 통치되지 않은지 오래됐다. 이 현상은 윤석열정부 들어 더 심해졌다. 냉정하게 말해 윤석열정권 2년 동안 국가가 제대로 통치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지정학적 위기와 기후위기, 기존 경제질서의 붕괴, 과학기술 혁명 등 지금 세계는 거대한 전환기에 들어섰다. 그런 변화를 수동적으로라도 쫓아가야 생존이 보장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우리 생존방식이기도 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이 이 대전환기를 어떻게 넘길지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그냥 이재명만 때려잡으면 모든 일이 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전문가들 중에는 지금 여권 상황이 촛불항쟁 전야였던 2016년 여름보다 더 심각하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당시를 복기해보면 섬뜩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닮은 데가 많다. 그해 7월 TV조선의 최순실 보도 이후 10월 말 JTBC의 태블릿보도로 촛불항쟁이 촉발되기까지 표층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심층에서는 4월 총선 패배에도 변하지 않는 박근혜정권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서고 있었다. 정권 담당자들이 사실상 국정 장악력을 상실하면서 ‘정유라씨의 말(馬)’ 같이 정권의 뿌리를 흔들 각종 제보들이 국회 국정감사를 통해 쏟아졌다. 하지만 그 즈음만 해도 그 물줄기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라는 거대한 강물이 될 줄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4월 총선 참패에도 변하지 않는 윤석열정권에 대한 민심은 싸늘하다 못해 아예 얼어붙었다. 윤 대통령 본인이나 김건희 여사 관련된 사건도 여러개가 동시다발로 진행중이다. 이미 통제력을 벗어난 공무원들의 제보가 야당 의원실에 쏟아지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올 국감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일촉즉발의 중동 상황, 불확실성을 더하는 미국 대선 등 불안정한 국제정세와 경기침체로 인한 서민경제 악화는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은 아직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상황이 민주당에게 좋은 일도 아니다. 보통 여권이 무기력하면 야권이 반사이익을 얻기 마련이지만 지금 민주당도 똑같이 외면받고 있어서다. 국민의힘보다 일관되게 낮게 나오는 민주당 지지도가 그 반증이다. 민주당은 지금 무너지는 윤석열정권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려는 노력보다 쪽수와 윤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미움에 기댄 막무가내식 폭주로 자신들의 정치자산을 까먹고 있다.
지금 국민 침묵이 더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데 정치권이 정말 놓쳐서는 안될 시그널은 따로 있다. 바로 지금 국민의 침묵이 단순한 냉소나 체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정치권을 향한 분노가 켜켜이 쌓인, 거대한 폭발력을 내부에 간직한 일종의 ‘의미심장한 침묵(Pregnant Pause)’일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 침묵이 더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질서를 잉태한(pregnant) ‘창조적’ 성격인지 그냥 ‘파괴적’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침묵 뒤의 폭발이 촛불항쟁처럼 집권세력을 향할지, 2017년 프랑스처럼 여야 기득권 정치 모두를 박살낼지, 아니면 사회질서 전체를 흔들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침묵이 깊을수록 폭발력도 클 것이라는 점 뿐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여야 모두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고 기대할만한 새 정치세력도 보이지 않는 만큼 자칫 국가리더십 공백상태가 올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정치권이 지금 국민의 침묵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되는 이유다.
남봉우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