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기 재혼, 가족 법적분쟁 늘어

2024-08-20 13:00:03 게재

간병인과 결혼한 부친 … 사기결혼 주장하는 자녀

고령화로 분쟁 증가 추세 … 후견인·신탁 활용 필요

A씨는 새어머니와 법적 다툼을 준비 중이다. 새어머니는 애초 부친의 가사도우미였다. 자녀들이 모르는 사이 부친과 가사도우미의 혼인신고가 되어 있었고 부친이 사망한 후 상속 문제를 정리하는 과정이서 이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가사도우미가 부친의 재산을 노리고 한 혼인신고로 보고 법적 대응을 준비 중이다. A씨는 “나이 60에 수개월 동안 새어머니가 생겼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숨을 쉬었다.

B씨는 치매를 앓던 부친이 사망한 이후 간병인이자 새어머니와 갈등을 빚고 있다. 간병인이 자녀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부친과 혼인신고를 한 사실을 알게 됐다. 현재대로라면 부친이 남긴 건물 지분 절반이 새어머니에게 갈 상황이다. B씨와 형제들은 부동산 처분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수억원의 현금을 주는 조건으로 간병인에게 상속 포기를 설득하고 있다.

20일 법조계에 따르면 황혼기 고령층이 자녀들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재혼하면서 가족간 분쟁을 빚는 일이 늘고 있다.

법원이 연령대별 혼인무효 소송을 별도로 통계로 잡지 않고 있어 객관적인 비교는 할 수 없다. 가정법원 근무 경력이 있는 한 법관은 “수년 전에는 고령자 혼인무효 소송이 제기되면 화제가 됐지만 최근에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늘었다”고 전했다.

대개 자녀들은 ‘사기결혼’이라고 주장하고, 새어머니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맞선다.

최근 법원 안팎에서 문제가 된 사건들은 황혼기 재혼한 당사자가 재력가인 남성인 경우, 자녀와 동거하지 않고 가사도우미에 의존하는 경우, 경증 혹은 중증 치매나 지병으로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한 경우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 혼인신고가 이뤄진 후 새로운 배우자의 자녀들에게도 상속이 이뤄질 때 갈등은 최고조에 이른다.

한국사회가 고령화 시대에 진입하면서 법조계는 관련 제도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혼인신고 뒤집기 어려워 = 가정법원 판사를 지낸 법무법인 동인의 이은정 변호사는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고 중장년보다 노인의 재력이 더 많은 시대가 되면서 분쟁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외롭고 옆에 아무도 없을 때 선의를 포장해 다가오는 불순한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최근에 접한 다수 사건은 유형이 비슷해 수법이 전수되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라며 “재혼 대상인 여성이 배우자와 나이가 20세 이상 차이나고, 혼인을 증명할 증거를 빼곡히 내놓을 때는 변호사로서 극도로 긴장된다”고 말했다.

대부분 자녀들은 재혼에 문제가 있다며 부친을 설득하거나, 아버지 대신 혼인무효소송부터 제기한다. 현재 한국의 혼인신고는 둘 중 한 명만 주민센터에 서류를 내면 이뤄지는 방식이다. 당사자 모두 주민센터에 혼인신고를 해야한다는 법 개정안이 논의됐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혼인신고는 쉽지만 이를 뒤집기는 매우 어렵다. 법원은 사기나 강박에 의한 혼인이 아니라면 이를 무효로 하는데 상당히 보수적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설령 둘 사이 합의에 의한 혼인이라도 한쪽이 사망하거나 치매, 질병을 앓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쟁이 발생하면 혼인의사가 있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혼인의사가 있었는지 여부는 오롯이 판사 몫이 된다. 결국 재혼 사실을 제때 알리지 못해 자녀와 새로운 배우자가 갈등을 빚게 된다.

법무법인 한중의 박기태 변호사는 “혼인무효를 청구하는 경우,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승소하기 어렵다”며 “혼인신고 당시 중증 치매 등 정상적 의사가 어려워 진실한 의사로 혼인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후견인 제도 가장 안전” = 고령의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녀들 사이에서는 유사 사례가 알려지면서 요양시설과 간병인간 계약 문제로 다투는 경우도 있다.

보호자들은 ‘간병인이 자녀 허락 없이 부친과 결혼하지 않을 것’ ‘상속 문제가 발생할 경우 요양시설이 손배배상 할 것’ ‘혼인할 경우 상속을 포기할 것’ 등의 특약을 요구하기도 한다. 요양시설이나 간병인이 특약을 거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승낙을 해도 분쟁이 발생하면 민법상 효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간병인은 대개 파견직이나 특수고용형태로 근무하고 있어 요양시설과 근로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요양시설이 책임지는 위치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홀로 된 노인들이 자녀들과 교류가 줄어들면서 생기는 문제로 보고 있다. 자녀들이 보호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데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안전장치로 가장 많이 꼽히는 것은 유언장과 신탁이다. 최근 금융권을 중심으로 생전신탁 상품을 내놓고 있다. 생전신탁은 유언장 없이 생전·사후 재산관리를 수탁자 뜻대로 관리하는 것으로, 수탁자가 건강이 악화되거나 갑자기 사망할 경우 대비할 수 있는 장치다.

또 다른 방법은 치매 진단 등이 나올 때 피성년후견인 제도를 활용하면 된다.

피성년후견인은 과거 금치산자와 유사한 개념으로 민법상 행위 무능력자를 말한다. 질병이나 장애 노령을 이유로 금융 거래 등을 처리할 능력이 안 되는 경우다. 본인이나 배우자, 사촌 이내 친족, 검사, 지방자치단체장이 청구하고, 가정법원이 받아들이면 후견인을 지정해 재산관리 등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한다. 이 변호사는 “법원으로부터 자녀가 후견인으로 지정되는 게 현재 법률 체계에서는 가장 안전하다”고 말했다.

혼인무효소송을 제기할 때 신뢰있는 증인을 확보하는 것도 관건이다. 대개 혼인신고 후 같이 찍은 사진 등이 증거로 제출되는 데 이를 뒤집을 증거를 구해야 한다.

법무법인 광야의 김성수 변호사는 “간병인과의 혼인이 이뤄졌다면 동료 간병인이나 요양보호사들의 증언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며 “간병인과 환자와의 호칭이나 평소에 어떻게 챙겨줬는지 등 두사람 관계가 실질적 혼인으로 볼 수 있는지 등 일관된 진술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오승완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