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제 개발경쟁 속 췌장암은 아직 미진
제약사들, 1조달러 규모 암 연구개발 투자 … 면역에 미반응, 유병률 낮아 췌장암 외면
최근 수년 동안 아스트라제네카의 엔허투, 머크의 키트루다, 노바티스의 플루빅토 등 새로운 암 치료제가 시장에 출시되면서 유방암과 폐암, 전립선암 환자들이 생명줄을 잡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진단 후 5년 이내 환자 8명 중 7명이 사망하는 가장 치명적인 췌장암을 퇴치할 새로운 무기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현재 췌장암 치료제로 사용되는 ‘폴피리녹스’는 4가지 약물을 섞은 혼합제로 1962년 처음 승인됐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 소재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췌장암을 연구하는 종양학자 아니르반 마이트라는 “병원에 오는 거의 모든 환자에게 오래된 약을 한데 모아 투여한다”며 “췌장암은 암들 중 가장 약한 고리”라고 말했다.
제약업계 리서치기업 ‘이밸류에이트(Evaluate)’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제약기업들이 항암제 개발에 약 1조달러를 지출했지만 췌장암과 대장암, 뇌암 등에 대한 혁신적인 치료법을 발견하는 데에 여전히 고전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7일 “췌장암 등 특정 유형의 암 치료제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이유 중 하나는 췌장암 세포의 복잡한 생물학적 특성 때문이다. 현재 40가지 유형의 암에 대해 승인된 키트루다와 같은 광범위한 표적 제품을 쓸 수 없다”며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제약사들과 정부, 자선단체가 암 연구개발에 투자하는 방향 때문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데이터제공업체 ‘아이큐비아(IQVIA)’에 따르면 지난해 시작된 2143건의 임상시험 중 거의 절반이 유방암과 폐암, 혈액암에 초점을 맞췄다. 췌장암 치료제를 연구하는 경우는 8% 미만에 그쳤다.
지난해 발표된 의학저널 ‘랜싯’ 연구에 따르면 2016~2020년 전세계적으로 췌장암 연구는 사망자당 317달러의 공공·자선기금의 혜택을 받은 반면, 유방암은 사망자당 약 3600달러 보조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보조금은 제약회사의 연구개발 지출에 비하면 왜소하지만 더 많은 실험연구를 위해 필수적이다. 미의회 예산국에 따르면 2019년 암에 대한 전세계 보조금은 총 130억달러였다. 반면 미국 제약사들이 연구개발에 지출한 금액은 830억달러였다. 이 가운데 상당부분은 암 임상시험에 쓰였다.
난치성 암과의 싸움에서 또 다른 걸림돌은 대중의 관심이 보다 보편적인 암 유형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췌장암행동네트워크의 최고경영자 줄리 플레시먼은 “췌장암에 걸리면 모두 사망하기 때문에 환자 중 췌장암 연구를 적극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며 “이 분야의 신약개발은 ‘오랜 실패의 역사’로 점철되어 왔다. 기업들이 수억달러를 투자한 치료제가 임상시험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스위스 제약사 로슈와 그 자회사 제넨텍의 종양학 책임자인 찰리 푹스는 “상업적 관점에서 유방암처럼 유병률이 높은 암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정 형태의 암들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이 부족한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미국 항암제 개발사 ‘레볼루션 메디신스(Revolution Medicines)’에 관심을 표하고 있다. 가장 흔한 유형의 췌장암을 대상으로 한 이 기업의 새로운 면역치료법이 종양 성장을 막았다는 초기단계 데이터를 발표하면서다. 올해 이 기업의 시장가치는 70억달러 이상으로, 지난해보다 약 50% 상승했다.
제약사들, 유병률 높은 암 우선시
영국 옥스퍼드셔에 거주하는 54세 전직 IT책임자인 클레어 마이어슨은 발병률이 높은 암에 대한 제약업계의 관심으로 혜택을 얻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2015년 말부터 전이성 유방암 치료를 받고 있다. 로슈의 표적항암제 ‘퍼제타(Perjeta)’를 썼지만 초기에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로슈의 또 다른 치료제 ‘캐싸일라(Kadcyla)’는 지난 8년 동안 그의 암 성장을 억제했다. 캐싸일라는 종양의 4분의 1에 존재하는 HER2단백질을 표적으로 삼는다. 그는 “전이성 유방암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쉽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며 “이전에는 치료 옵션이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이 분야의 진보는 과학이 암 치료의 가능성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준다. 아스트라제네카와 일본 다이이찌 산쿄가 개발한 엔허투는 단백질을 표적으로 삼아 생존율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가장 성공적인 항체약물접합체이지만, 아직 마이어슨과 같은 국가의료보험(NHS) 환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다.
메드스타 워싱턴 병원의 위장종양 전문의인 존 마샬은 “원래 HER2 발현이 있으면 매우 나쁜 소식이었다”며 “이제는 환자가 HER2 양성이었으면 좋겠다 여길 정도로 제약업계가 효과적인 치료법을 개발했다”고 말했다.
마샬이 대장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물인 세툭시맙(Cetuximab)과 벡티빅스(Vectibix)는 약 20년 전 승인됐다. 그는 “20년 동안 대장암 치료에는 근본적인 발전이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새로운 치료법이 곧 등장할 전망이다. 바이오엔텍과 제넨텍은 소규모 초기 임상시험에서 유망한 결과를 얻었다. 현재는 수술 후 종양 재성장을 막기 위한 대장암 백신을 공동 연구하고 있다. 또한 임상개발 초기단계에 있는 췌장암 백신도 연구하고 있다.
제넨텍의 종양학 책임자 푹스는 “작지만 점진적인 성과를 목표로 하고 있다”며 “췌장암 백신은 매우 어려운 질병에 대한 중대한 진전이다. 전세계 보건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사업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제약사 ‘브리스톨 마이어스 스퀴브’는 올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일부 대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새로운 2차 면역치료제를 신속 승인 받았다. 레볼루션 메디신스의 선도적 약물과 동일하게 ‘KRAS 유전자 변이’를 표적으로 하는 치료제다.
KRAS는 췌장암의 90%, 대장암의 약 40%, 폐암의 약 25%에 존재한다. 문제의 이 돌연변이는 불과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치료할 수 없는 표적으로 여겨졌다. 현재 제약사들은 이 유전자의 다양한 변이를 연구해 그 효과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나타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있다.
미국에 본사를 둔 글로벌 제약사 BMS의 최고의학책임자 사밋 히라왓은 이에 대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많은 인내와 회복력이 필요하다. 많은 약물들이 실패한다”고 말했다.
레볼루션 메디신스의 골드스미스는 “췌장암은 면역반응성 암이 아니기 때문에 암 치료의 상당 부분을 진일보시킨 면역항암제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즉, 새로운 치료법의 ‘황무지’였다”고 말했다. 면역항암제는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암세포를 공격하게 만드는 항암제다.
KRAS를 활성화해 췌장암 세포의 면역반응성을 높게 만들면 연 매출 250억달러의 블록버스터급 치료제 키트루다 같은 면역항암제가 효과를 낼 가능성이 커진다.
종양학자들, 췌장암 정복 희망 안 버려
미국에서 전립선암을 판단하는 혈액검사는 30년 전에 승인됐지만, 대장암에 대한 비슷한 검사인 액체생검(liquid biopsy)은 지난달에야 승인됐다. 췌장암에 대한 비슷한 검사는 아직 먼 이야기다.
미국에서는 45세 이상의 성인을 대상으로 대장내시경 검사를 권유하는데, 적격 성인 중 약 30%가 대장내시경 검사를 피하고 있다. 검사 전 24시간 동안 음식을 멀리하고 진정제를 투여받기 때문이다. 특히 젊을수록 수검률이 낮다.
‘쉴드(Shield)’라는 새로운 대장암 혈액검사를 개발한 미국 바이오기업 ‘가던트 헬스’의 최고경영자 헬미 엘투키는 “액체생검이 암 검사와 관련해 존재하는 건강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엘투키는 혈액검사를 확대해 여러 암을 검사하는 것이 췌장암 유무의 빠른 판단에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유방암과 전립선암, 대장암, 폐암에 대해서만 광범위한 검진프로그램이 있다.
하지만 혈액검사킷 제조사인 그레일(Grail)과 이그잭트 사이언스(Exact Science), 프리놈(Freenome)의 제품은 아직 인기를 끌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 해당 장비들의 양성·음성 판단 신뢰성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시티 오브 호프 국립의료센터’의 예비연구결과에 따르면 정확도 90 % 이상인 초기 췌장암 검사를 개발했다. 개발을 주도한 종양학자 아하이 고엘은 “췌장암을 조기 발견하면 외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말기환자에게도 개발중인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치료법과 검사가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종양학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메드스타 워싱턴 병원의 마샬은 “생물학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는 한편 검진부터 새로운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거대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다”며 “때문에 가장 치료하기 어려운 암들에 대한 돌파구가 곧 열릴 것이라는 희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고 말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