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예산승인권 사각지대 ③ 국회 확정 예산, 정부가 재심사
국회서 증액까지 확정해 놓고 예산 미배정한 사업만 17개
‘효율성’ 내세워 수시배정사업 지정해 놓고 배정 여부·시기·규모 조정
법률로 지방에 넘기도록 보장된 지방교부세·교부금도 정부 통제 ‘논란’
국회 예산정책처 “국회 예산확정권 제약 … 분기별 수시배정 보고해야”
정부가 국회에서 확정된 예산을 재심사해 다시 배정하는 ‘수시배정사업’이 국회의 심사, 승인권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해 정부는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해 놓고는 아예 예산을 배정하지 않기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에 의한 국회 확정 예산의 수시배정은 불필요한 예산배정을 방지하고 배정 시기를 탄력적으로 조절해 재정을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국회가 확정한 예산에 대하여 행정부가 사실상 다시 한번 심사하는 셈으로 국회 심사권과 확정권을 침해한다는 비판도 계속돼 왔다. 수시배정대상으로 지정된 사업의 예산이 배정되지 않거나 일부만 배정될 경우 국회에서 확정된 예산을 임의로 바꾸는 꼴이 되므로 국회의 예산확정 권한에 대한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29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정부는 ‘2023회계연도 결산’을 통해 지난해 수시배정 세부사업은 69개이었다고 밝혔다. 수시배정사업 대상액은 15조9003억원으로 이 중 15조7624억원이 배정돼 배정률은 99.1%를 기록했다. 배정된 금액 중 15조7517억원이 집행돼 배정액 대비 집행률 역시 99.9%로 높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사업별 배정률을 사업수로 나눈 사업별 배정률의 평균은 64.9%에 지나지 않았다. 최근 5년간 가장 낮은 배정률이다. 각 부처별로 보면 방송통신위원회(41.5%), 문화체육관광부(36.4%), 외교부(35.4%), 질병관리청(28.6%), 국토교통부(26.8%), 해양수산부(14.7%)는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중소벤처기업부, 방위사업청,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기획재정부, 국무조정실, 국가보훈부 등 6개 부처, 18개 사업은 대상액 전액을 배정받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업수로 따지면 전체의 26.1%에 해당하는 규모다. 문제는 예산 미배정사업 18개 중 교육부의 교원양성기관 교육역량 강화 사업 1개를 제외하고, 17개 사업은 모두 국회에서 증액된 사업들이라는 점이다. 최근 3년간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된 사업 중 국회에서 증액된 사업의 비중이 2021년에는 67.6%, 2022년에는 80.2%에서 2023년 81.2%로 증가하는 등 상당수가 국회 심의단계에서 증액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배정을 받긴 했지만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사업도 적지 않았다. 국토교통부(27.4%), 여성가족부(0.9%), 산림청(0.2%)은 배정사업 집행률이 크게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환경부의 전기전자제품 및 자동차의 재활용체계 구축 운용 사업과 해양수산부의 지속가능한 어업 생산체계 구축사업 등 2개 사업 예산이 배정되었지만 배정된 예산을 전혀 집행하지 못하기도 했다.
김태은 국회 예산정책처 예산분석관은 결산분석보고서를 통해 “국회 증액사업 중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되고 예산이 전혀 배정되지 않아 국회 증액 예산이 전액 불용처리된 것은 국회의 예산심사권을 형해화한 사례”라며 “기획재정부는 해당 사업의 조속한 집행을 위해 소관 부처와의 협의를 강화하는 등 관련 예산이 배정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고, 각 부처도 국회 증액사업을 수행할 경우 관리 미흡으로 인해 사업이 지연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지방교부세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 등 예산규모가 세수의 일정 비율로 정해져 있는 지방이전재원을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하는 것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방교부세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을 재원으로 하는 사업 중 지난해에는 재난안전관리특별교부세(행정안전부), 재난안전관리특별교부금(교육부), 국가시책특별교부금(교육부) 등 3개 사업이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됐다. 지방교부세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은 법률로 예산규모가 세수의 일정 비율로 정해져 있고 사업여건이나 내용과 관계없이 해당연도 재원을 모두 지방자치단체에 교부해야 하는 지방이전재원이다. 집행이 어려운 사업에 예산배정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로 재정운영의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수시배정제도의 취지에 맞지 않다는 얘기다.
김 분석관은 “기획재정부는 매년 지방교부세와 지방교육재정교부금 사업들을 수시배정사업으로 지정하고 예산의 집행을 통제하고 있다”면서 “‘국가재정법’에 따른 수시배정제도의 대상은 정부 재정사업으로, 지방교부세나 지방교육재정교부금과 같이 법정의무지출도 대상인지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지방교부세법과 지방교육재정교부금법에 따라 법률로 보장된 지방자치단체 재원을 기획재정부의 배정 영역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재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수시배정제도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김 분석관은 “수시배정제도는 국회가 심의, 확정한 사업의 시행여부, 시행시기, 사업금액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재심사한다는 측면에서 국회의 예산확정권을 제약하는 위험소지가 있다”며 “수시배정제도는 가급적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운영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획재정부가 수시배정사업 지정과 배정 내역을 분기별로 국회 소관 상임위원회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보고하도록 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관련 기획재정부는 “예산 집행권은 정부의 고유 권한으로 수시배정제도의 취지를 감안할 때 집행단계에서는 정부의 집행권을 보장하고 집행내용은 결산심사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 분석관은 “예산 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용과 전용 내역은 분기별로 국회에 의무적으로 제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수시배정 내역과 사유를 국회에 보고하는 것이 정부의 집행권한을 제한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또한 재정운용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제고하기 위한 정보제공이라는 측면으로 보는 것이 보다 합당할 것이며, 국회의 예산 심의·확정권을 존중하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고 할 것이므로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