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자유’정부의 ‘관치망령’
요즘 금융시장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은행의 대출금리가 제2금융권인 보험회사보다 더 높아진 것이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주택담보대출금리가 연3.65~6.05%로 오르면서 보험사인 삼성생명(연3.59~5.04%)을 넘어섰다. 은행들이 “대출시장 과열을 억누를 조치를 내놓으라”는 금융당국 압박에 따라 연일 금리를 끌어올린 결과다.
반면 보험회사들은 기준으로 삼고 있는 3년 만기 국고채의 금리하락을 반영, 주담대 금리를 되레 낮추고 있다. 은행들이 금리인상 행진을 계속할 가능성이 큰 만큼 대표적 서민 금융기관인 새마을금고의 주담대금리(최저 연 3%대 후반)마저 추월할 날이 멀지않았다는 관측도 나온다.
윤석열정부 선심성정책의 후유증 수습하기
제1금융권인 은행과 2금융권 간의 이런 금리역전은 금융시장의 상식을 깨뜨리고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다. 1금융권은 우량한 고객에게 낮은 금리로 대출을 공급하고, 2금융권은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떨어지는 고객에게 높은 금리로 돈을 빌려주는 것이 금융시장의 기본원리이기 때문이다. 가계대출 억제를 위한 정부 개입이 은행들에만 집중되면서 금융시장에 심각한 왜곡이 일어나고 있다.
금융당국 나름의 고충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금융권 맏이’인 은행들의 팔목을 비틀어서라도 과열된 대출시장을 진정시키겠다고 나설 만큼 상황이 심상찮다. 정부와 가계의 부채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지난 6월 말 기준 두 부문의 부채합계액은 3024조원이다. 지난해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1.3배 수준, 올해 국가 예산(656조원)의 5배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가계부채 증가세가 특히 심상치 않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이 2분기에만 16조원에 달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빚잔치’는 세계 추세와 거꾸로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에 돈을 적극 풀었던 선진국들이 지난해부터 ‘부채 다이어트(돈 거둬들이기)’에 나섰는데도 한국은 손을 놓고 있었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관찰대상 11개 선진국(유럽연합 포함) 가운데 지난해 말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총부채 비율이 2년 전보다 늘어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통계를 최근 내놨다. 저소득층과 젊은 세대 등을 대상으로 한 보금자리론과 디딤돌대출 등 저금리 정책대출을 ‘나 홀로’ 늘려온 결과다. 역대 최저수준 지지율을 헤매고 있는 정부와 여당의 선심성 정책 후유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진보’를 표방하는 야당의 집권기에 이보다 더 많은 ‘약자 지원 정책대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때는 미증유의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충격을 견뎌내기 위해 전세계적으로 금융·재정 확장정책이 펼쳐지던 상황이었다.
코로나 기간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난 시중통화로 물가가 뜀박질하자 미국 등 선진국들은 재빠른 시중자금 환수에 나서며 ‘인플레와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였다. 한국정부는 그런 와중에도 금융시장을 취약계층과 부실기업에 대한 지원수단 일변도로 삼는 정책기조를 고수했다. 되레 대출시장 과열을 더 부추기기까지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작년 초 “은행은 (이자장사만 해서는 안 되는) 공공재”라고 언급하자 금융감독원장이 은행들을 돌아다니며 ‘상생금융’ 명목 아래 금리인하를 압박했던 게 단적인 사례다.
국내외 거시경제 환경 통찰하며 흐름 놓치지 않길
이런 식으로 대출시장 과열을 부채질해놓고는 가계부채가 위험수위를 넘어서자 이번엔 “담보대출 금리를 올리고 대출조건도 강화하라”는 식으로 또다시 은행들을 닦달하고 있다.
경제 전반의 암초로 떠오른 부채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노력 자체를 비판할 건 아니다. 그러나 취임사에서 ‘자유’를 35차례나 언급할 정도로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를 국정의 최우선 기조로 내세웠던 윤석열정부이기에 돌아봐야 할 게 많아 보인다. 국내외 거시경제 환경을 제대로 통찰하면서 흐름을 놓치지 않는 정책을 펴고 있는 건지, 성찰하는 계기라도 됐으면 좋겠다.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