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보행통로인데…담장 치고, 출입 막고

2024-09-05 13:00:01 게재

강남 대단지아파트 중심으로 확산

준공 승인 이후 지역주민 통행 막아

서울시 "이행강제금 부과권한 달라"

공공보행로를 반영해 준공 승인을 받은 뒤 입주 후 이를 차단하는 행위는 일종의 꼼수다. 하지만 강남권을 중심으로 이 같은 행위가 확산되고 있다.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1320세대)는 등산객이 단지 내부를 자주 오간다는 이유로 1.5m 높이 철제 담장을 만들었다. 출입증이 있어야만 오갈 수 있어 외부인은 이용이 불가능하다. 입주한 지 5년된 인근 ‘래미안 블레스티지’(1957세대)도 지난해 공공보행로 출입구를 막는 담장을 새로 설치했고 개포래미안포레스트(2296세대)는 담장을 무단으로 설치해 강남구와 갈등을 겪었다.

강남권을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들의 공공보행로 폐쇄가 확산되고 있다. 반포 한 아파트가 보행로 출입구를 불법 담장으로 차단한 모습. 사진 서울시 제공

공공보행로 차단이 문제가 되는 것은 지역 주민의 이동편의를 낮추고 앞으로 해당 지역 도시계획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공보행로를 폐쇄한 반포르엘 아파트는 당초 개방됐던 보행로를 이용하면 333m였던 이동동선이 단지를 빙 둘러 가게된 탓에 597m로 늘어난다. 개포디에이치아너힐즈의 경우 단지를 가로질러 가면 411m이던 이동거리가 763m까지 길어진다.

전문가들은 도시계획 측면에서 더 우려되는 것은 보행로 폐쇄가 대단지 아파트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서울에는 수백개의 재건축 재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한 도시계획 전문가는 “높은 용적률을 적용받아 대부분 대단지 아파트로 탈바꿈하는데 이들이 모두 공공보행로를 차단할 경우 심각한 이동동선 문제가 발생한다”며 “주변과 연계없이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늘어나면 외딴섬 같은 단지가 양산되고 교통, 환경, 유기적인 도시 운영 등이 모두 차질을 빚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막을 장치 없어, 제도개선 시급 = 공공보행로 차단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지자체는 딱히 이를 제제할 방법이 없다. 서울시는 재건축 속도를 높이는 신속통합기획을 약 80여곳에서 추진 중인데 모두 공공보행로 설치가 필수로 반영돼 있다. 지역주민들의 안전한 보행권 확보를 위해 단지 내에 조성하는 공공보행통로의 경우 설치 면적에 따라 최대 10%p까지 용적률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같은 혜택을 모두 누린 뒤 준공 후 수년이 지나 불법 담장을 만든다해도 별다른 제재 방안이 없는 것이다. 시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 줄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하지만 국토부는 지자체에 지나치게 포괄적인 제제 권한을 준다면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서울 한 자치구 관계자는 “선출직 지자체장은 주민 눈치를 더 살필 수 밖에 없어 무리한 적용은 하라고 해도 못한다”면서 “한마디로 지자체를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개선에 미온적인 정부를 마냥 기다릴 수 없는 서울시는 공공보행로 구간에 지상권을 설정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아파트의 토지 구획과 권리관계를 확정한 뒤 지상권을 설정하면 시가 지상에 대한 사용권을 획득하게 된다. 땅은 입주민 소유지만 서울시 허가없이 지상에 불법 담장을 설치하거나 공공보행로를 차단할 수 없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재산권과 통행권 중 어느 권리를 앞세울 것인지를 두고 논란이 거듭될 수 있다. 또다른 도시계획 전문가는 “갈등과 논란이 반복되는 사이에 더 많은 공공보행로가 차단되고 출입증 없인 다닐 수 없는 길이 늘어날 것”이라며 “공공보행로는 각종 재건축 지원을 제공받고 내놓은 명백한 공공기여 시설이기 때문에 제도규정을 분명히 하는 것이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이제형 기자 brother@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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