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추세 역행하는 공정위…플랫폼법 제정 없던 일로
공정거래법 개정해 끼워 팔기 등 4대 독점폐해 막겠다지만
사전지정 빠져 예방효과 없고 플랫폼업 변화속도 못 따라가
자영업·시민 단체 “정부, 플랫폼업계 반발에 백기투항” 비판
야권은 별도 플랫폼법 제정 재추진 … 향후 국회 추이 주목
공정거래위원회가 2년째 추진하던 ‘온라인 플랫폼 경쟁촉진법’ 제정을 포기했다. 플랫폼업계의 거센 반발에 백기투항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소상공인연합회와 시민단체들의 반발이 거세다.
공정위는 기존 공정거래법을 개정, 공룡플랫폼의 독점폐해를 규제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플랫폼법 제정을 추진하면서 스스로 한 말을 뒤집는 꼴이 됐다. 최근까지도 공정위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플랫폼산업 특성상, 기존 법으론 독점폐해를 막기 어려워 플랫폼을 제정해야 한다”고 설파해왔기 때문이다.
글로벌 추세와도 맞지 않다. 유럽과 미국 등은 사전 지정제를 통해 초대형 플랫폼의 시장 지배력 남용 행위를 강력히 규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한국시장이 글로벌 플랫폼들에게 장악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기존 법으론 플랫폼 규제 어렵다더니 = 10일 공정위에 따르면 정부는 기존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대형플랫폼의 독점행위를 규제하기로 했다.
공정위가 추진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시장지배적 온라인 플랫폼의 4대 반경쟁 행위를 ‘사후 규제’하는 것이 골자다. 4대 반칙행위는 △자사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경쟁 플랫폼 이용) 제한 △최혜대우 요구 등이다.
그동안 공정위는 온라인 플랫폼법을 새로 만들어 유럽연합(EU)의 디지털시장법(DMA)과 유사한 방식의 ‘대형플랫폼 사전지정 규제’ 제도를 도입하려 했다.
사전지정제도를 도입하면 법 위반행위 이전에 구글이나 카카오와 같은 대형플랫폼업체는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된다.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되면, 위법행위 발생시 ‘경제분석 과정’을 건너뛰고 불법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춰 조사와 심의가 이뤄진다.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경제분석 과정이 사라져 신속한 사건 처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사전지정제가 빠진 기존 법을 적용하면 큰 사건의 경우 조사 착수부터 제재가 확정되기까지 2~4년까지 걸린다. 개별 사건마다 시장 획정, 점유율과 이용자 수 확인 등을 거친 뒤 규율 대상 기준을 충족하는지를 두고 매단계마다 다퉈야 하기 때문이다. 1년쯤이면 시장판도 자체가 바뀌는 플랫폼산업 특성상 제재효과가 없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사전지정제’는 이런 논란의 결과물이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브리핑에서 “당초 사전 지정 방침을 발표했으나 사전 지정 방식이 행정비용과 사업자 부담을 늘릴 수 있다는 전문가·업계·관계부처의 의견이 많았다”며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사후규제) 방식을 도입했다”고 설명했다.
◆독점 플랫폼 기준도 후퇴 = 개정안이 ‘시장지배적 플랫폼’ 기준을 기존 공정거래법상 ‘시장지배적 사업자’ 기준보다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나온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시장지배적 사업자’를 1개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50% 이상이거나 3개 회사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75% 이상인 경우로 규정하고 있다.
개정안은 ‘시장지배적 플랫폼’ 기준을 1개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60% 이상이고 이용자 수 1000만명 이상인 경우, 또는 3개 이하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85% 이상이고 각 사 이용자 수가 2000만명 이상인 경우로 완화했다. 이 모든 요건을 충족하더라도 연간 매출액 4조원 미만 플랫폼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기준대로라면 배달의민족·쿠팡 등이 ‘시장지배적 플랫폼’에서 빠진다. 배달의민족·요기요·쿠팡이츠 배달 3사의 시장점유율은 96%가 넘지만, 배달의민족은 지난해 연 매출액 3조4155억원으로 ‘연 매출액 4조원 초과’에 해당되지 않는다. 쿠팡은 지난해 매출액이 30조원을 넘겼지만, 시장점유율 조건에 미달이다. ‘시장지배적 플랫폼’ 기준을 충족하는 기업은 구글, 애플, 네이버, 카카오 등 소수에 그칠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지배적 플랫폼 기업에는 ‘반칙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입증책임을 부과한다. 다만 공정위는 “경쟁 제한성이 없는 경우 등에 대한 항변권을 충분히 보장하겠다”고 했다.
소비자 권리 보호와 입점업체의 집단교섭권 보장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정부안은 시장지배적 지위에 있는 상위 4개 기업 정도만 규제하고 나머지 플랫폼들은 현행 공정거래법으로 규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관리하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사실상 플랫폼규제 포기선언” = 시민단체들은 “사실상 독점규제법 제정 포기 선언”이라고 비판했다.
참여연대 등 10개 시민단체는 공동성명을 내고 “이번 발표는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의 독과점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해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법제도 마련에 나서는 국제적 추세에 역행하는 것일 뿐 아니라 내용도 기존 공정거래법보다 크게 나아간 것 없이 오히려 일부 후퇴한 개악안”이라고 지적했다.
시민단체들은 “공정위 추진 기준에 따르면, 쿠팡과 티메프, 배달의민족은 독과점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며 “임시중지명령 제도나 과징금 상한을 높인 것은 유의미할 수 있으나 제재 대상이 되는 기업 자체가 극소수인 상황에서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정위가 규제 대상으로 밝힌 행위 또한 이미 시행 중인 규제에서 나아진 점이 없다”며 “앞에서는 강력한 법 집행 운운하면서도 뒤에서는 플랫폼 기업들의 눈치만 보다가 결국 대다수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법 제정을 포기한 정부와 공정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했다.
◆국회 논의과정 주목 = 글로벌 추세에도 역행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국과 달리 주요국은 거대 플랫폼을 제재하기 위해 ‘사전 지정제’를 적극 활용하는 추세다.
지난 3월 전면 시행된 유럽연합(EU)의 ‘디지털 시장법(Digital Market Act·DMA)’이 대표적이다. DMA는 거대 플랫폼 사업자를 ‘게이트키퍼(독과점 사업자)’로 지정해 특별 의무를 부과한다. 당초 EU는 게이트키퍼에 구글 모회사 알파벳,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6사를 꼽고 이들이 제공하는 핵심 플랫폼 서비스 22개를 규제 대상으로 지정했다. 이후 5월에는 여행 사이트 부킹닷컴도 게이트키퍼로 추가 적용해 총 7개 기업이 됐다. EU는 매출과 월간 활성 사용자 수, 영향력 등을 기준으로 게이트키퍼를 정한다.
게이트키퍼에는 경쟁을 촉진하고 불공정 행위를 예방해야 하는 18가지 의무가 부과된다. 시장 지배력을 이용해 경쟁을 저해하는 행위를 하거나 자사 서비스를 우대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자사 제품이나 서비스를 경쟁사 제품보다 우선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금지된다. 18가지 의무를 위반하는 경우 총 매출액의 최대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할 수 있다.
영국에선 디지털시장, 경쟁소비자법(DMCC)이 올해 말 시행을 앞두고 있다. 게이트키퍼와 유사하게 거대 플랫폼 기업에 전략적 시장 지위를 부여해 규제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본과 인도도 애플·구글 등 거대 디지털 기업을 지정해 이들을 별도로 규제할 수 있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공정위가 발표한 대책은 국회에서 크게 수정될 가능성도 있다. 국회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사전지정제를 뼈대로 한 온라인 플랫폼 독점 규제에 관한 법률 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법안을 대표 발의한 김남근 의원은 “사전지정제는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