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실존적 위기’ 유럽의 교훈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달 발표한 ‘유럽연합(EU)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가 화제다. “EU가 인공지능(AI) 등 첨단 정보기술(IT)에서는 미국에, 배터리 등 청정기술 분야에서는 중국에 밀리면서 실존적 위기에 처해있다”는 등 솔직한 자성(自省)을 담고 있어서다.
드라기 전 총재는 328쪽에 달하는 보고서에서 “EU가 미국 중국과 경쟁하려면 연간 최대 8000억유로(약 1188조원)의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지난해 EU 역내총생산(GDP)의 4.7%에 달하는 규모다. 유럽을 제2차세계대전의 잿더미로부터 일으켜 세운 미국의 ‘마셜 플랜’ 투입자금이 당시 유럽 경제규모의 약 2%였다. 그보다 두배가 훨씬 넘는 투자를 퍼부어야 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하다는 진단이다.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드라기는 2012년 유럽 재정위기 당시 ECB 총재를 맡아 과감한 통화완화정책으로 위기 확산을 막아내 ‘슈퍼 마리오’로 불린 경제전문가다.
첨단 기술기업이 이끄는 미국, 구 모델 기업이 이끄는 유럽
유럽 경제의 미래에 ‘실존적 위기’를 느끼고 있는 사람은 그뿐만이 아니다.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ECIPE)가 작년 7월 내놓은 ‘EU가 미국의 주(州)였다면’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유럽이 처한 현실을 보다 직설적으로 일깨웠다. 2000년 독일과 프랑스의 GDP를 미국의 50개 주별 GDP 순위와 비교했을 때 각각 31번째, 36번째 주와 비슷했는데 20여년 사이에 38번째, 48번째 주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것이다. “EU국가들은 인프라가 부족하고 R&D 비용을 미국보다 40%나 적게 쓰며 시장 역동성마저 떨어진다”는 게 보고서의 분석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비슷한 보고서를 내놨다. 2012년에만 해도 미국과 EU의 GDP가 각각 16조2540억달러와 14조6501억달러로 별 차이를 보이지 않았지만 2028년에는 32조3497억달러와 21조1113억달러로 격차가 확 벌어질 것이라는 내용이다.
유럽 경제의 앞날을 비관하게 하는 더 결정적인 지표가 있다. 미국과 유럽의 증권시장을 이끄는 상장기업들의 숫자와 그 면면이다. 작년 8월 기준으로 세계 증권시장의 시가총액 상위 30대 기업 가운데 21개 기업을 미국이 차지한 반면 유럽 기업은 단 네곳에 그쳤다.
기업들의 면면은 더 비교된다. 미국은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모회사) 아마존 엔비디아 등 정보기술 기업들이 최상위권에 오른데 비해 유럽에선 명품회사인 LVMH(루이뷔통모에헤네시)와 식품회사 네슬레가 1위와 3위를 차지했다. 미국을 첨단 기술기업들이 이끌고 있는 반면 유럽은 구모델 기업들이 상위권에 똬리를 틀고 있다. 이런 곳에서 시장경제의 활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유럽 경제를 이 지경으로 만든 요인으로 지나친 규제행정 풍토가 꼽힌다. 기업인들이 무슨 일을 해보려고 해도 온갖 규제장치에 발목이 잡혀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EU의 식품규정이 단적인 예다. ‘전통 나폴리 피자’를 정의하는데 2만4000개의 단어를 나열하고 있고, 사과 마케팅에 필요한 ‘빨간 사과’에 관해서는 3만자를 동원하고 있다. 이런 식의 장황하고 과도한 규제주의가 영국을 EU에서 탈퇴(브렉시트)케 한 최대 요인으로 꼽힌다. 그런 진통을 겪고도 좀체 달라진 게 없다.
미국이 유럽 압도하는 건 규제 최소화 덕분
상황이 이런데 마셜플랜보다 두배가 넘는 재정자금을 쏟아 붓는다고 해서 EU 경제가 되살아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미국이 유럽을 압도하는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것은 정부가 공적자금을 대대적으로 퍼부어서가 아니다. 실리콘밸리 등 곳곳의 기업들이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도록 규제를 최소화한 덕분이다. “미국은 혁신하고(innovate), 중국은 모방하며(replicate), 유럽은 규제한다(regulate)”는 페드루 도밍고스 워싱턴대 교수의 말이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