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드라기 리포트’가 던지는 화두

2024-10-17 13:00:04 게재

전 이탈리아 총리이자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로 유럽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마리오 드라기가 주도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드라기 리포트)가 워싱턴 싱크탱크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경제시스템 하에서 값싼 러시아산 가스를 수입해 고부가가치 제조업을 일으켜 전세계에 수출하는 경제모델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 가격은 치솟고,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과 과잉공급 수출에 치이고, 미국발 산업정책과 막대한 보조금에 EU기업들의 투자를 대서양 건너로 빼앗기며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혁신의 차이’가 미국과 유럽 경제 운명 갈라

뉴욕타임스는 독일산 차가 중국에서 수백만대 팔리던 지난 10여년 동안 BYD 등 중국 전기차 메이커들의 신기술을 무시하며 과거의 성공에 지나치게 안주했고, 독일정부도 재정흑자로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고 오히려 균형재정을 강제하는 법을 통과시키며 황금의 시대를 낭비한 것이 오늘날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드라기 리포트의 메시지는 엄중하다. ‘혁신의 차이'가 운명을 갈랐다는 것이다. 시장가치 1조유로를 넘는 테크기업이 미국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6개가 등장할 정도로 역동적인 반면, EU에는 1000억유로를 넘는 테크기업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드라기 리포트에 대해 미국 EU 전문가들과 토론하며 필자는 EU와 한국의 상황이 중첩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단일시장과 규모만 다를 뿐 급변하는 글로벌 경제환경과 미중 지정학적 상황에서 수출 중심, 레가시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에서 새로운 패라다임으로 시급히 전환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한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드라기 리포트를 보며 글로벌 시황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수출실적을 떠나서 과연 5년 후, 10년 후 대한민국의 산업경쟁력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하는 화두를 던져본다. 5000만 인구의 내수만으로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어려운데 그나마 합계출산율(0.72) 세계 최저로 인구는 줄어들고 고령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의 명목GDP는 2020년 세계 10위를 찍은 후 지난해에는 14위로 하락했다. 인구규모가 크고 젊은 개도국들이 계속 치고 올라올 것이다. 경제규모로만 따지면 G7도 어려운 목표다. 한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반도체 자동차는 산업 패라다임이 급속히 바뀌며 미중간 지정학적 긴장의 한가운데 있다.

메모리 중심의 한국 반도체산업이 아직 비메모리 기술에서 고전하는 동안 TSMC 미국 아리조나 공장은 대만 수준의 수율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구마모토 TSMC 반도체 공장도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확대를 추진 중이다. 전기차는 소프트웨어의 승부인데 가트너의 2024년 디지털자동차인덱스에서 10위권은 거의 중국차로 채워졌고 한국기업은 15위에 랭크됐다.

한국판 ‘드라기 리포트’가 필요한 때

미국 수출통제 압박과 중국 거시경제의 어려움에도 중국판 ‘소부장’의 기술굴기는 계속 진전과 축적을 이루고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실제로 탑승해 본 자율주행택시는 이미 16개 이상의 도시에서 운행중이고, 바이두의 자율주행택시는 700만회 탑승을 기록했다. 중국에서는 매년 220만의 이공계 졸업생이 배출되는데 우리는 그 1/10에 불과하다. 그나마 공대 대신 의대로 간 수재들은 거리에 나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중국에서 만난 한국기업들은 중국의 혁신과 기술발전 속도가 워낙 빨라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중국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과거 저가생산, 거대시장 진출을 위해 몰려가던 중국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있어야 하는 중국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글로벌 경쟁 하에서 국가 생존 차원의 ‘경쟁력’을 화두로 들어본 지 오래다. 과거에 파묻혀 미래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국판 ‘드라기 리포트’가 필요한 때다.

여한구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위원 전 통상교섭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