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 달러패권 이번엔 달라질까
지난 80년 무소불위 영향력 … 이코노미스트 “달러패권 균열 내려는 브릭스에 관심”
1944년 미국 브레턴우즈회의는 달러패권의 시작을 알렸다. 80년이 지난 이후 현재까지 금태환중지, 글로벌 금융위기 등 크고 작은 사건사고, 우여곡절이 있었다. 하지만 달러패권은 건재하다.
21일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지난 20년 간 각국 외환보유고 중 달러비중은 60% 후반대에서 50% 후반대로 하락했지만 달러표시 국가간 금융부채나 채권 발행량은 오히려 늘었다. 전세계 총생산 대비 미국 비중이 2000년 23%에서 최근 16%로 하락했지만 달러의 힘은 막강하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연구원들은 지난해 “달러 지배력이 지난 20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달러가 여전히 강력한 한가지 이유는 네트워크 효과다. 많은 사람들이 달러를 사용할수록 달러 사용에 대한 인센티브가 커진다.
달러의 또 다른 힘은 금융제재다. 달러로 거래하는 전세계 은행은 무조건 미국 소재 환거래은행을 거쳐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얼마를 보냈는지’ 워싱턴에서 손금 보듯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다.
존스홉킨스대 헨리 퍼렐 교수와 조지타운대 에이브러햄 뉴먼 교수는 공저 ‘지하제국 : 미국은 어떻게 세계경제를 무기로 만들었나’에서 이같은 달러의 힘을 판옵티콘(panopticon, 원형교도소), 초크포인트(choke point, 관문) 효과로 불렀다. 2021년 기준 미국 금융제재 리스트에 오른 이들은 약 9400명으로, 20년 전보다 900% 늘었다.
그동안 달러패권에 균열을 내려는 시도는 많았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중국이 무역결제에서 위안화 사용을 늘리고 있지만 미미한 규모에 그친다.
최근 가장 공을 들이는 나라는 러시아다. 2022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미국 등 서방세계로부터 2820억달러에 이르는 자산을 동결당했다. 러시아은행들은 스위프트(SWIFT, 국제 은행간 통신협회)에서 퇴출당했다. 미국 환거래은행을 통한 지급결제를 거부당했다. 비자와 마스타카드는 러시아 사업을 즉각 접었다.
브릭스, 탈달러 방안 논의
22~24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리는 브릭스 정상회의가 서방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이유도 달러패권과 관련 있다. 주최국인 러시아는 달러체제를 우회할 방법을 참가국과 논의한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브릭스 국가들은 카잔 정상회담에 앞서 여러차례 사전 모임을 가졌다. 주요 안건은 신용평가기관 신설과 비자·마스터카드를 대체할 소매결제 시스템, 재보험사 신설 등이다. 러시아산 석유와 가스를 운송하는 유조선들이 서방 재보험사로부터 계약을 해지당하면서다.
가장 중요한 안건은 ‘브릭스 브릿지(BRICS Bridge)’로 불리는 지급결제 디지털 플랫폼이다. 각국 중앙은행이 운영하는 플랫폼을 통해 국가간 지급결제를 처리한다는 것이다. 달러청산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는 환거래은행이 아니라 각국 중앙은행들이 국가간 거래의 중심에 선다.
금융시스템을 탈중앙화하기 때문에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를 네트워크에서 배제할 수 없다. 시중은행들은 자국 중앙은행과 거래하기 때문에, 외국계 은행과 양자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다. 달러기반 네트워크 효과를 우회할 수 있게 된다.
러시아 재무부와 중앙은행이 이달 48쪽분량 보고서를 통해 브릭스 브릿지 계획의 개요를 발표했다. 계획에 따르면 향후 1년 내 시스템을 구축할 방침이다.
국제결제은행 모델 차용한 브릭스 브릿지
아이러니한 건 브릭스 브릿지가 차용한 모델이 중앙은행들의 중앙은행으로 불리는 국제결제은행(BIS)의 ‘엠브릿지(mBridge)’ 시범프로젝트라는 점이다. BIS는 느리고 값비싼 달러 지급결제 체제를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중국 홍콩 태국 아랍에미리트 중앙은행들과 함께 이 프로젝트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중국 국영언론들은 “브릭스 브릿지 계획은 BIS 주도 엠브릿지로부터 교훈을 얻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했다.
BIS 실험은 설계상 순수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 훨씬 전인 2019년 시작됐다. 이 프로젝트에 관여한 여러 관계자들에 따르면 엠브릿지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수일이 걸리는 거래를 단 몇초에 끝냈고 거래비용도 사실상 제로였다.
올해 6월 BIS는 엠브릿지가 ‘최소기능제품(MVP, minimum viable product)’ 단계에 다다랐다고 밝혔다. MVP는 제품의 핵심기능만 포함한 초기버전으로 시장의 검증을 기다리는 단계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중앙은행이 이 프로젝트의 5번째 파트너로 합류했다. 31개국 중앙은행들이 옵저버로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의 잠재력을 확인한 서구에서는 금융제재를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한 게 아니냐고 우려하고 있다. 일각에선 BIS가 너무 순진했던 게 아니냐며 불만을 드러낸다. 미 재무부 국제금융 담당차관 제이 샴보는 “누군가 달러체제 밖에서 정치적 이유로 거래한다면 그들이 보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되길 원한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연준은 새로운 디지털 통화체제의 효율성으로 국가간 무역에서 달러의 활용도가 허물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코노미스트지는 “잠재적으로 현재의 달러시스템보다 훨씬 효율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달러패권을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BIS가 의도치않게 지정학적 지뢰밭에 발을 내디뎠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브릭스를 주도하는 중국 또는 러시아가 엠브릿지 개념과 코드를 그대로 따다 쓸 수 있을까. 일각에선 엠브릿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가들이 지적재산을 브릭스 브릿지에 넘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코노미스트가 취재한 다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중국은 엠브릿지를 구동시키는 소프트웨어와 코드 개발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인민은행은 프로젝트 산하 기술분과를 이끌면서 엠브릿지 디지털원장(digital ledger)을 구축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해당 기술과 노하우가 BIS나 서구국가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병행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에 대응하는 미국의 선택지는 2가지다. 하나는 달러와 경쟁하려는 새로운 결제시스템을 방해하는 것이다. 미국 등이 ‘사악한 의도를 가진 국가들이 엠브릿지를 악용할 수 있다’고 경고한 이후 BIS는 프로젝트 개발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이지 않을 방침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달러기반 시스템을 개선해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이다. 미국은 이미 경쟁의 고삐를 다잡고 있다. 올해 4월 뉴욕연방준비은행은 현존 시스템을 더 빠르고 저렴하게 만드는 BIS의 또 다른 프로젝트에 합류했다. 연준은 또 자국내 즉시결제 시스템을 다른 나라들의 시스템과 연결하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 SWIFT는 이번달 “강력한 네트워크 효과와 신뢰도 등의 이점을 지렛대 삼아 내년 디지털 결제의 시범사업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달러시스템에 불만 많은 신흥국들
물론 브릭스 브릿지도 막중한 도전과제에 직면할 전망이다. 일단 유동성을 확보하는 일이 어렵다. 참가국 정부들의 은밀하고 거대한 보조금 투입이 요구될 수도 있다. 또 두 나라 간 자본 흐름과 무역이 불균형하다면, 각각의 통화가치에 기반한 자산 또는 부채를 축적해야만 한다. 이는 브릭스 브릿지의 매력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브릭스 회원국 간 불신도 걸림돌이다. 핵심멤버인 인도는 중국에 대한 깊은 불신을 갖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통화 시스템의 운용을 위해선 참여국들이 청산결제 규정과 금융범죄 단속규정에 합의해야 한다. 만장일치 합의가 카잔 정상회의에서 이뤄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브릭스 브릿지 계획이 모멘텀을 얻었을 수 있다. 현재 국가간 지급결제 시스템은 너무 느리고 너무 비싸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전했다. 미국 등 경제선진국들은 현존 시스템을 신속히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반면, 많은 신흥국들은 아예 새로 구축하길 원한다.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 카운슬은 “최소 134개 국가 중앙은행들이 국내 목적으로 디지털통화를 실험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이후 국가 간 거래 목적의 디지털 통화를 연구하는 국가는 약 2배 늘어 13개국이 됐다.
한편 브릭스 정상회의의 탈달러 기조는 점차 고조될 전망이다. 내년 브릭스 정상회의는 브라질에서 열린다.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은 달러패권을 강력 비판하는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룰라 대통령은 지난해 “매일 밤 나는 자문한다. 왜 모든 나라가 달러를 기반으로 무역을 해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그것을 결정했는가”라고 토로한 바 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