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대통령의 순애보
며칠 전 만난 여권 인사는 “대통령의 순애보가 참 짠하다”고 내뱉었다.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과 민심을 뒤흔들고 있지만 오로지 윤석열 대통령만 “구체적 문제가 있어야 조치가 가능하다”며 버티는 상황을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들렸다.
민심은 물론 국민의힘조차 김 여사에 대한 ‘강력한 조치’를 요구하지만 윤 대통령은 “내 아내는 내가 지킨다”는 반응뿐이다. 여권 인사들도 윤 대통령의 순애보에 복장 터지는 모습이다.
김 여사는 대선 무렵부터 숱한 논란에 휩싸였다. 자신의 허위 이력 논란이 일자 “경력을 부풀리고 잘못 적은 것이 있다”며 대국민사과를 했다. 김 여사는 “남편이 대통령이 되더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집권 이후에도 숱한 구설수를 자초했다. 명품백을 수수하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황제조사’ 논란을 일으키더니 검찰로부터 무혐의처분까지 받아내 국민의 화를 돋우었다. 명태균씨에게 “철없이 떠드는 우리 오빠” “무식하면 원래 그래요” “지가 뭘 안다고”라는 원색적 메시지를 보내 보는 국민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여당 대표조차 “(김 여사) 라인은 존재하면 안 된다”고 말할 만큼 ‘김건희 라인’을 둘러싼 논란도 컸다. 대통령실 내에서 ‘김건희 라인’의 발호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윤 대통령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여당 대표의 3대 요구안(△대외활동 중단 △대통령실 인적 쇄신 △의혹 규명 절차 협조)을 받아야 한다. 특별감찰관과 나아가 ‘김 여사 특검’도 수용하는 게 옳다. 윤 대통령이 ‘구체적 문제를 갖고 와라’는 식으로 버티기에는 김 여사를 향한 국민적 의혹과 분노가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다.
윤 대통령은 혹시 노무현 대통령의 “아내를 버려야 합니까”란 연설을 떠올리며 억울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경쟁자들이 장인의 좌익 활동을 공격하자, 이를 “버려야 합니까” 한마디로 되치기했다.
많은 이들이 노 대통령의 연설에 공감한 건, 경쟁자들이 공격한 대목이 부인의 잘못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좌제는 폐지된 지 오래였고, 슬픈 가족사를 건드린 공격은 저열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의 호소에서 진실된 순애보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김 여사를 둘러싼 논란은 전부 김 여사가 자초한 일이다. 누구를 핑계댈 일이 아니다. 윤 대통령의 순애보가 울림이 없는 건 ‘동업자 비호’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김 여사가 자신을 겨냥한 의혹을 털어낼 기회를 줘야 한다. 언제까지 아내를 ‘국민 밉상’으로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윤 대통령의 결단, 그게 진짜 순애보다.
엄경용 정치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