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체제개편 방향은 '주민자치' 활성화

2024-10-29 13:00:18 게재

‘책임읍면동제·광역동’ 흐지부지 폐지

명칭만 바뀌고, 주민은 실험대상 전락

정부가 30년만에 행정체제 개편에 나섰다. 인구감소와 지방소멸 등 행정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자치분권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지방자치의 근본인 주민자치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행정체제를 개편해야 한다고 한다. 한발 더 나가 선진국들처럼 아예 읍·면·동을 기초지방정부로 격상, 주민 참여와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 30년만에 행정체제 손본다 = 행정안전부 ‘미래지향적 행정체제개편 자문위원회(미래위)’는 지난 22일 대구엑스코에서 ‘행정체제개편 권고안’ 마련을 위한 세미나를 열고 대구·경북권 의견을 수렴했다. 미래위는 지난 5월 민선지방자치 30주년(2025년)을 맞아 정부 차원의 행정체제 개편방향을 마련하기 위해 구성됐다. 미래위는 대구·경북을 시작으로 11월 말까지 충청 호남 경남 중부 5개 권역을 돌며 지역의견을 수렴한다. 현장 의견수렴을 거쳐 연말까지 미래지향적 행정체제개편 권고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미래위는 행정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권 과밀해소와 국가균형발전 등에 기여할 행정체제를 목표로 다양한 개편방안을 검토해왔다. 검토안에는 총선 때 이슈가 된 김포 서울편입 등 행정구역변경부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대구·경북 행정통합은 물론 △자치계층 재검토 △읍면동 등 하부행정기구 효율화도 포함됐다.

2024년 1월 1일 부천시는 광역동을 폐지하고 3개 일반구, 37개 동 체제로 전환했다. 사진은 원미구청 현판 개청식. 사진 부천시 제공

◆멈춰선 ‘읍면동 행정개편’ = 하지만 정부가 행정체제 개편에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특히 읍면동 행정체제는 역대 정부를 거치며 수차례 개편됐다. 김대중정부 때 ‘동사무소’를 ‘주민센터’로 전환하기 시작했고 2007년 9월 1일 전국 모든 동사무소 명칭이 ‘동주민센터’로 변경됐다. 동사무소 명칭이 바뀐 것은 52년 만이었다.

박근혜정부 시절엔 ‘책임읍면동제’가 시범 실시됐다. 당시 안전행정부(행안부)는 2014년 업무보고에서 주요과제로 50만명 이상 대도시의 일반구 설치 대신 복지중심 기능 강화를 위한 ‘대동제’ 추진계획을 보고했다. 2015년 4월 14일엔 행정자치부가 ‘책임읍면동제’ 시행계획을 발표했다. ‘대동’은 대도시의 일반구 폐지를 전제로 2~3개 동을 통합한 모델이고 ‘책임읍면동’은 50만 미만 도시에서도 2개 이상의 읍·면·동을 묶되 1곳을 대표 읍·면·동으로 정해 더 큰 권한과 책임을 부여, 시·군·구청의 주민편의 기능까지 제공하도록 한 모델이다. 당시 경기도 시흥 군포 부천 남양주, 강원 원주, 세종, 경남 진주 7곳에 도입했다.

하지만 ‘책임읍면동제’는 1년도 되지 않아 흐지부지됐다. 발표당시 장관이었던 정종섭 전 장관이 사퇴한 후 사실상 중단됐다. 박근혜정부는 이듬해인 2016년 3월 17일 찾아가는 복지상담 등을 통해 주민 복지체감도를 높이겠다며 ‘읍면동 복지허브화’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동시에 읍·면·동 사무소 명칭을 ‘행정복지센터’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박근혜정부 때만 대동제·책임읍면동제·행정복지센터 3개 정책이 추진·발표된 셈이다.

◆‘행정’보다 ‘주민’ 중심으로 사고해야 = ‘책임읍면동제’를 도입한 도시 가운데 부천시는 2019년 3개 일반구(원미·소사·오정구)를 없애고 ‘광역동’ 체제로 전면 개편했다. 전국 최초로 ‘시-구-동’ 3단계 행정계층을 ‘시-광역동’ 2단계로 줄여 행정효율화를 이룬 사례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광역동 실험’은 실패했다. 부천시는 올해 1월 일반구 3개, 37개 동 체제로 되돌아갔다. 불과 4년 만이다. 광역동 체제가 실패한 이유는 ‘주민’보다 ‘행정’이, ‘수요자’보다 ‘공급자’가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민건동 자치정책연구소장은 ‘광역동 폐지·일반동 전환’ 토론회에서 “행정구 폐지와 광역동 전환은 설문이나 용역이 아닌 주민투표를 했어야 할 사안이었다고 생각한다”며 “광역동 시행 이후 인력감축이나 예산절감 효과는 없었고 주민들은 더 불편하고 더 비효율적이란 의견이 많다”고 지적했다. 민 소장은 “주민자치 관점에서 광역동 단위 인구(7만명 이상)는 주민자치를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향후 부천시의 대안은 행정구가 자치구가 되도록 지방자치법 등 개정운동을 통해 자치계층과 행정계층이 같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처럼 정부와 지자체는 주민과 가장 가까운 행정단위인 읍면동의 명칭과 기능을 개편하면서 공급자 위주의 정책을 펴왔다. 주민은 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에 주민을 읍면동 개편의 주체로 삼고 나아가 ‘읍·면·동’을 주민자치 선진국들처럼 기초지방정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희 부산대학교 경제통상연구원 연구교수는 “지방자치 선진국들에 비해 한국의 기초지자체는 인구규모가 너무 커서 풀뿌리자치가 어렵다”며 “시민참여와 의사결정이 용이한 읍·면·동을 기초지방정부로 전환해 자치입법·행정·재정권을 부여하고 지역실정에 맞게 기관구성 형태도 주민이 선택해 다양한 자치를 경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태영 기자 tykwa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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