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민낯 드러난 ‘메르켈 리더십’

2024-11-05 13:00:01 게재

‘유럽 경제의 기관차’였던 독일의 부진이 심상치 않다. 독일정부는 최근 올해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를 –0.2%로 수정 발표했다. 지난 4월 내놨던 0.3% 성장 전망을 ‘마이너스’로 0.5%p나 하향조정한 것이다. 지난해(-0.3% 성장)에 이어 두 해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유로존(유로를 공용통화로 쓰는 20개 유럽국가) GDP의 30%를 차지하는 독일 경제의 거듭된 부진은 세계 경제 전반에도 큰 악재가 아닐 수 없다.

부진 면치 못하는 '유렵 경제의 기관차' 독일 경제

독일 경제가 부진에 빠진 원인으로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가격 폭등과 중국 경제의 부진,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원자력발전을 전면 폐기한 이후 주력 에너지로 의존해 온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끊기면서 전기요금이 폭등했고 그 결과 기업들의 경쟁력과 국민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독일 제조업체들이 최대 시장인 중국의 부진으로 판로를 대거 잃은 것은 엎친 데 덮친 격이 됐다. 독일이 다시 ‘유럽의 병자’로 되돌아가는 조짐을 보이면서 16년간 독일을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책임론의 도마에 올랐다. 지난 2021년 9월 퇴임할 때까지 높은 국내외 지지 속에서 4년 임기의 총리를 4번이나 연임한 그가 “도대체 제대로 일을 한 게 뭐가 있느냐”는 논란에 빠져들었다. 2005년부터 16년간 재임하는 동안 분야별 국가경쟁력을 키우지 않고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에너지는 러시아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체질로 고착화시킨 결과 지금과 같은 질곡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0월 24일자 최신호에서 '앙겔라 누구시라고? 점점 더 끔찍해지는 메르켈의 유산'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의 재임시절 실정(失政)을 조목조목 꼬집었다. 그가 고비마다 내린 주요 정책결정들이 하나같이 독일은 물론 유럽 전체에 악재를 안겼다는 내용이다.

안정적인 신재생에너지 수급 등의 대책없이 ‘탈(脫)원전’을 졸속으로 서둘러 러시아산 가스에 대한 의존도를 치명적으로 높여놓았고, 재정적자 감축에만 급급해 사회간접자본시설 확충 등 미래 성장동력 투자를 끊은 것 등을 대표적인 실정 사례로 꼽았다. 게다가 전통 제조업 강국인 독일의 산업을 디지털시대에 맞춰 다각화하는 노력을 외면하는 등 16년이나 재임하는 동안 개혁에 전혀 손대지 않아 독일을 ‘유럽의 경제적 병자’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재임기간 내내 국방예산을 GDP의 1.3% 수준으로 묶어놓아 방위산업을 육성하기는커녕 안보를 거의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는 체질로 약화시켰고, 주택 확충 등 필요한 조치없이 해외난민을 대거 받아들이는 ‘과시형 정치’를 내지른 것도 큰 실책으로 지적됐다. 해외이민 대거 유입으로 집값이 치솟는 등 국민 불편을 가중시킨 결과 외국인혐오를 노골화하는 배타적 극우세력이 득세하게 됐기 때문이다.

16년간 독일 이끌었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책임론 도마에 올라

메르켈로서는 어느 하나 반박하거나 변명하기가 쉽지 않을 지적들이다. 그가 재임한 16년 동안 누린 줄 알았던 ‘태평성대’가 엄청난 재앙을 잉태한 기간이었음을 알게 된 독일인들의 실망과 배신감이 커진 건 당연한 귀결이다.

퇴임 직전까지 70%에 이르는 고공 지지율을 자랑했던 메르켈의 인기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독일 언론에는 그의 이름을 딴 ‘메르켈른(Merkeln, 가능한 한 큰 결정을 뒤로 미루다)’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온화한 표정에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는 그의 정치스타일에 ‘엄마(Mutti) 리더십’이라는 별칭까지 붙이며 극찬했던 다수 학자와 언론들의 처지가 궁색해졌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도 서점에는 그를 ‘여장부’ ‘통일리더십’ 등의 수식어를 붙여가며 칭송한 책들이 수두룩하다. 독일을 ‘메르켈 보유국’으로 부르며 부러워한 전문가도 한둘이 아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앞으로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어떤 게 ‘진정한 리더십’인지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이학영 경제사회연구원 고문 전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