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베트남민족의 전근대적 기원

2024-11-07 13:00:04 게재

요즘 어지러운 세계정세를 관망하다 보면 외국과의 전쟁을 통해 민족을 형성한 베트남의 역사가 새삼 중요한 선례로 부각된다. 푸틴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을 언어적 문화적으로 동족이라고 하는 주장은 지난 2년여 전쟁에서 수만명의 무고한 생명을 잃은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이제 씨알도 안 먹힐 소리가 되었다. 80년이 다 되어가는 중동분쟁과 전쟁은 변변한 국가를 제대로 가져보지 못했던 ‘팔레스타인 땅의 무슬림들’을 이제 단단한 하나의 ‘민족’으로 만들어 준 게 아닐까?

뿐만 아니라 전쟁이 민족을 만들고 또 더욱 강하게 묶어준다는 역사적 명제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지도자들은 수도 없이 많다. 북한이 느닷없이 한국과 다른 국가임을 주장하는 것도 ‘조선인민민주주주공화국’은 ‘대한민국’과 다른 독자적인 ‘민족’을 가지고 있으며, ‘조선 민족’은 미국으로부터 전쟁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처지와 운명에 놓여 있음을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러나 전쟁 위험이나 ‘협박’은 실제 전쟁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니 그것의 민족형성 효과는 얼마나 오래 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착취와 차별, 식민지배 고통이 만든 민족

베트남은 유달리 전쟁이 많았고 그중 외국과의 전쟁이 많았으며, 그 외국들은 대부분 주변과 세계적 강대국들이었다. 앞서 몇 차례 인용한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민족주의는 근대화의 산물이고 특히 19세기 식민주의 시대에 아메리카를 필두로 한 신세계와 식민지에서 착취와 차별을 공통적으로 경험한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서 싹텄다고 주장한다. 다른 가닥의 민족주의는 ‘관변 민족주의’로 독일이나 일본 같은 후발 산업화 국가들에서 출현했다.

베트남 민족주의의 기원은 근대화나 산업화와는 시대적 배경이나 정치경제학적 상황이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그 선조들이 기원후 첫 1000년을 중국 지배 하에서 함께 착취와 차별을 당하고, 다음 1000년을 외세의 침략 전쟁 식민지배로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 공통된 경험은 베트남인들을 하나의 운명적 공동체로 묶어내기에 충분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인들과 다른 운명을 가졌음을 느끼게 한 결정적 계기는 1932~33년 소련정부가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에서 강제 공출한 식량을 비축해 놓고도 300만명이 넘는 우크라이나인들을 굶겨 죽인 홀로도모르(아사, 대기근)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다른 지역,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베트남 민족은 수천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배양되고 성장했다.

유럽에서 산업화가 막 시작되고 그 여파가 아시아 식민지에 미치지 않았던 1788년 12월, 떠이선반란을 주모한 3형제 중의 한 사람 응우옌 후에는 자신과 베트남을 배신하고 침략자 청나라 군대에 붙은 레왕조 마지막 황제 찌에우 통을 부정하고 스스로 꽝쭝(光中)황제 자리에 올랐다. 군사가 6000명에 불과하던 새 황제는 청군과 레왕조의 본거지 탕롱(하노이)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모으는 격문을 띄웠다. 그는 베트남의 역사 속에서 중국에 맞서 싸웠던 쯩자매, 리왕조의 트엉 끼엣 장군, 쩐왕조의 쩐흥다오, 레왕조를 세운 레러이 황제의 정통성을 잇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했다… 우주에 땅과 별이 제 자리를 갖고 있듯 북의 중국은 그들의 국가가 있고, 남의 다이비엣은 우리만의 국가가 있다. 북쪽 사람들은 우리와 인종이 다르고 우리와 생각이 다르며 우리에게 우호적이지도 않다. 한나라때부터 그들은 우리를 수없이 침략해 우리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다.”

이 격문에 호응한 이가 무려 10만명이나 됐고 수백마리의 코끼리가 자원 징발되었다. 전쟁은 40일 뒤에 끝났지만 그 준비에만 35일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 베트남식 필승전략대로 갖가지 거짓정보와 위장전술을 동원했고, 심지어 황제가 거짓 항복하겠다는 문서까지 보내며 적군을 안심시켰다.

1789년 1월 25일 다섯 갈래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했는데 20만명에 달하던 청군과 레왕조 군대를 무너뜨리고 하노이를 함락하는 데는 5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베트남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전쟁을 부르는 이름 중 하나가 ‘제1차 구정대공세’다. ‘제2차 구정대공세’는 무려 179년이 지난 뒤인 1968년 1월 30일 남베트남 수도 사이공에 대해 가해졌다.

허황된 전설처럼 들리는 이 전쟁 이야기를 꺼낸 것은 반란을 일으켜 새 왕조를 세운 응우옌 후에(꽝쭝)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수의 군사를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꽝쭝의 격문에서 “우리나라 땅 국가 인종 사람”이란 말들이 설득력이 없었다면 불과 며칠 만에 10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을 리 만무하다. 중국(청나라)과 다른 ‘우리나라(다이비엣)’, 중국인들과 다른 ‘베트남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어렴풋이나마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민족의 중요한 요소를 고유한 문화라고 한다면 꽝쭝이 황제 즉위 즈음 한 연설 중 “우리(베트남인들)의 장발문화를 간직하기 위해 싸우자, 우리의 흑치문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라고 외친 대목에서도 정체성의 단면이 드러난다.

강대국에 승리했다는 자부심이 큰 역할

전쟁이 베트남인들에게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시켜 준 또 하나의 중요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강대국과의 결정적인 전쟁들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측면이다. 물론 역사적인 사실은 수많은 전투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그 결과로 점령과 식민지배를 받은 기간이 2000년의 역사에서 절반에 이르지만, 현재 베트남인들이 자랑하고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은 승리한 전쟁들일 것이다. 전쟁, 그것도 중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부심은 민족적 정체성과 민족주의 고취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발리의 투계, 필리핀의 선거, 영국의 축구경기가 승리한 집단에게 별 다른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관객 또는 참가자들이 엄청난 내기돈을 걸고 결사적인 응원을 하는 것은 집단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긍지를 높이려는 의도를 공유하고 있다고 했다. 하물며 게임과 도박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 전쟁의 승리가 민족적 정체성 강화에 미칠 효과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유념해야 할 것은 베트남인들의 민족 관념이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베트남의 민족은 태초부터 다문화적 복합적이었다. 락 롱 꿘 건국설화부터가 북쪽(중국)과 남쪽(동남아), 산악과 해안지대, 부계와 모계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아우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 온 관리 실력자 이민자들은 토착인과 함께 중국지배자들로부터 차별 당하고 저항에 참여하는 한 현지사회에 수용되었다. 논쟁적이긴 하지만 베트남 역사상 첫 토착정권으로 인정받는 남비엣(난위에)을 창건한 찌에우 다(자오투오) ‘황제’는 중국 한나라의 관리였다. 중국이 1000년을 지배한 ‘북속기’에도 수많은 중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베트남 사회에 정착하고 동화했다. 1800년 마지막 왕조로 베트남을 통일했던 응우옌왕조는 다종족을 넘어 다국적군의 도움으로 건국되었다.

소수민족 말살한 이면도 기억해야

하지만 확대지향의 베트남 민족과 포용적인 베트남 민족주의도 어두운 이면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5세기 이전만 하더라도 현재 베트남 영토는 참파왕국과 크메르왕국이 3분하고 있었다. 중부지방에서 1000년 이상 존속했던 참파왕국은 15세기에 레왕조와 전쟁으로 패망하고, 크메르왕국의 영토였던 메콩델타 지역은 19세기 응우옌왕조에 강제 편입되었다.

베트남 역사에서 남띠엔(南進)이라고 지칭되는 이 시기에 참족과 크메르족은 거의 다 사라져 현재는 총인구의 2%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들이 역사에서 종적을 감추게 되는 과정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주로 고산지역에 거주하는 다른 52개 소수민족의 역사도 그리 순탄치 않다.

신윤환 서강대 명예교수 정치외교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