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ICC가 두테르테 수배하면 협조”
‘조사불가’에서 태도 변화
재임 시절 수천명을 재판도 없이 희생시킨 무자비한 ‘마약과의 전쟁’으로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국제형사재판소(ICC)의 단죄를 받을 위기에 몰렸다. 필리핀 정부가 ICC가 인터폴을 통해 두테르테 전 대통령을 국제 수배할 경우 협조할 뜻을 표명한 때문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과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사이가 크게 악화한 가운데 마르코스 행정부가 기존의 ‘조사 불가’ 방침에서 한발 물러난 것.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 2022년 대선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딸인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과 러닝메이트를 이뤄 당선된 ICC의 조사를 거부한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혀 왔다.
14일(현지시간) AP·로이터·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루커스 버사민 필리핀 행정장관은 전날 성명을 내고 ICC가 두테르테 전 대통령과 관련해 인터폴에 조회해 적색수배(국제체포수배)를 필리핀 당국에 보내면 “정부는 적색수배를 존중해야 할 요청으로 간주할 의무가 있다고 느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 경우 국내 법 집행 기관은 확립된 규약에 따라 인터폴에 전적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버사민 장관은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ICC에 자수하기를 원한다면 “정부는 이에 반대하거나 막으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ICC의 두테르테 전 대통령 조사를 거부하겠다는 마르코스 행정부의 그간 자세가 달라진 것이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이날 기자들과 만나 “우리는 ICC에 협력하지 않는다. 이것이 이 정부의 입장”이라면서도 ICC가 인터폴을 통해 적색수배 조치를 할 경우 “우리는 인터폴에 대한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ICC 조사에 동의할 경우 ICC를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며 “우리는 그저 협조하지 않을 뿐”이라고 했다.
이날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ICC와 관련해 오락가락했다.
그는 “ICC는 전혀 무섭지 않다. 내일이라도 와서 조사를 시작하라”고 했다가, “나는 곧 죽을지도 모른다. 내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감옥에서 영원히 썩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ICC 조사관을 마주하면 “발로 걷어차겠다”고도 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2016년 취임 직후부터 대대적인 마약 범죄 소탕 작전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마약 복용자나 판매자가 곧바로 투항하지 않으면 총격을 가해 용의자 약 6200명이 사망한 것으로 필리핀 정부는 집계했다. 이에 비해 ICC 측은 사망자 수가 1만2천~3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이와 관련해 ICC가 2018년 마약과의 전쟁 예비조사에 착수하자 필리핀은 ICC를 탈퇴했다. 이후 ICC가 정식 조사에 나서자 필리핀은 자체 조사를 하겠다며 조사 유예를 신청하기도 했으나, ICC는 필리핀 정부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는다며 조사 재개를 결정했다. 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