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세상에 아름다운 여운을 이어가는 ‘추모기부’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우리 딸. 정말 잘했어!’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생전 ‘잘했다’는 칭찬을 자주 해주셨거든요.”
최은미씨는 시장을 오고 갈 때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꼈다. 최씨는 시장에서 식당을 운영하며 평소 어려운 이에게 선뜻 국수 한그릇 내어주시던 어머니의 따뜻한 흔적을 영원히 남길 방법을 고민하다 지난 8일 어머니 생일을 맞아 어머니 이름으로 기부를 했다. 이로써 평생을 어려운 이웃과 아이들을 위해 꾸준히 나눔을 실천해온 ‘조자야’님의 이름 석 자는 유산기부 후원자로 등재돼 영원히 남게 됐다.
고인의 뜻 다음 세대 전하는 특별한 방법
우리 삶은 소중한 순간과 기억으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시간, 우리의 손길로 변화시킨 세상, 나눔으로 따뜻해진 마음까지 우리 삶의 흔적들은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아름다운 여운과 같다. 고 조자야 후원자 사례처럼 유산기부는 고인의 숭고한 뜻을 다음 세대로 전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 중 하나다.
유산기부는 생을 마친 후 남겨진 재산의 전부 또는 일부를 사회에 기부하는 나눔 형태다. 해외에서는 이미 주요한 기부방식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영국의 경우 유산기부가 1990년대 8억파운드(약 1조4160억원)에서 2020년 30억파운드(약 5조3100억원) 수준까지 늘었고, 2050년에는 200억파운드(약 35조4000억원)를 넘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산기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고인의 이름으로 기부하는 ‘추모기부’가 주목 받고 있다. 부모 자녀 형제자매 등 사랑했던 이를 떠나보낸 슬픔을 나눔으로 승화해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고인을 기리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초록우산에는 유산기부 후원자모임이 있다. ‘그린레거시클럽’이라 불리는 이 모임에는 현재 103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중 추모기부 후원자는 37명으로 전체의 36%에 달하는데 그 수가 점차 증가하고 방법이나 절차 등에 대한 문의도 늘고 있다.
유산기부가 실제로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킨 사례도 하나둘씩 나오고 있다. 비인두암으로 투병하던 민수(가명)는 항암치료를 받아 빠르게 건강을 되찾고 있다. 민수의 변화에는 후원자 김씨의 유지가 있었다. 김씨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본인이 떠나고 난 뒤 어린아이들이 아플 때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어머니께 유산기부를 부탁했다. 어머니는 아들과의 마지막 약속을 지키기 위해 1억원이라는 큰 돈을 아들의 이름으로 내놓았고, 민수처럼 투병하던 아동들은 내일을 다시 꿈꿀 수 있게 됐다.
선행이 선행을 부르는 나눔의 선순환
유산기부는 고인이 된 후원자와 다음 세대 모두에게 의미가 깊다. 장학금을 받아 열심히 공부하는 아동, 의료비를 지원 받아 병을 이겨내고 뛰노는 아동, 자립지원금을 받아 자격증을 따며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자립준비청년 등 도움을 받은 아동은 후원자의 지원으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는다. 나눔을 받은 기억이 몸과 마음에 배어 타인을 위해 손을 내미는 것도 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선행이 선행을 부르는 나눔의 선순환이다.
누군가의 이름은 삶의 끝에서 더 빛을 발하고, 더 진한 여운을 남긴다. 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며 내린 숭고한 결정이 다른 이의 삶을 바꾸고,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소중한 이의 여운이 이 세상에 아름답게 남도록 더 많은 사람들이 따뜻한 동행에 함께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