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빨라진 크리스마스’ 선거 스트레스를 대처하는 미국인의 자세
새로운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었다. 박빙이라고 예견되었지만 선거 결과는 의외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트럼프가 예상보다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면서 어떻게 그가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지 다양한 해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럼프 2기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세계 곳곳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가 다음 대통령이 되지 않기를 바랐던 진영에서는 절망과 허무함에 빠졌다. 양 진영 모두 마찬가지겠지만 올해 민주당 진영에서는 넘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갑작스럽게 후보를 바꾼 상태로 캠페인을 진행해야 했고, 여론조사 결과가 마지막까지 초접전 상태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다는 희망과 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공존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해졌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실패했다는 사실과 함께 무력감이 찾아오는 듯하다. 다른 나라에 비해 선거운동 기간이 유독 긴 미국에서는 오랜 기간의 캠페인과 긴장감으로 더 큰 무력감이 찾아왔을지 모른다. 지난 1~2월부터 시작된 선거의 긴장감을 이 순간 놓아버린 것일까. 이런 실망감이 반영되듯 미국 내에서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유독 빠르게 느껴지는 이유
미국 미디어기업 악시오스(Axios) 조사에 따르면 미국 소매상들은 올해 블랙 프라이데이를 홍보하는 시기와 크리스마스용품을 판매하는 시기의 간격을 5일이나 짧게 잡았다. 가정용품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기업 로이스(Lowe’s)는 전년보다 한달 이른 7월에 크리스마스 관련 장식 상품들을 판매하기 시작했고, 아마존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세일행사인 ‘프라임데이’를 10월 초로 앞당겼다. 전미 소매업연맹은 올해 미국인들이 크리스마스 선물과 장식에 지난해보다 25달러 증가한 902달러를 지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미국은 여름 휴가철이 지나가면 일찌감치 핼러윈 행사를 준비한다. 핼러윈과 관련된 물품과 준비가 9~10월 내내 한창 이어지다가 핼러윈이 끝나고 나면 바로 추수감사절을 기다린다. 이때를 전후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블랙 프라이데이’ 쇼핑 기간이 찾아오고 연말을 준비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그야말로 미국의 가을은 핼러윈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와 연말행사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이들에게 여러가지로 큰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차기 대통령이 트럼프로 결정된 직후 다른 해에 비해 크리스마스 준비가 유독 빠르게 느껴진다. 그 이유를 지금 바로 추측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투표일이 다가오면서 이전보다 빠르게 크리스마스용품을 구매하는 미국인들의 모습들이 목격되었다는 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달랠 이유로 크리스마스를 빠르게 준비하기 시작한 것 아닐까. 선거 당일에도 소셜미디어에는 선거 때문에 불안해서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기 시작했다는 글과 함께 불이 켜진 트리, 산타 인형, 선거 결과를 비추고 있는 텔레비전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미 이러한 불안감은 오랜 시간 동안 미국 정치권 전반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10월 말 발표된 월스트리트저널 여론조사에서 유권자의 87%는 지지 후보가 패배할 경우 미국이 영구적인 손해를 입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 해리스 지지자 중 57%는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답했고, 트럼프 지지자의 47%는 해리스가 승리할 경우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답했다. 유권자의 절반 이상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미국의 분열이 계속 커질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또한 트럼프의 당선으로 불확실한 시대가 도래하면서 도피와 위안을 찾으려는 심리,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가져다주는 따뜻함과 향수를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최근 수년 동안 미국 우파 진영에서는 연말이 다가옴에 따라 크리스마스를 지키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해서 보였다. 이른바 ‘크리스마스와의 전쟁’이다. 종교적 색채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지향하는 좌파 진영의 ‘해피 할리데이(Happy Holiday)’를 거부하고, ‘메리 크리스마스(Merry Christmas)’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 크리스마스 전쟁의 핵심적인 상징이다.
트럼프는 본인의 두둔세력 중 하나인 폭스뉴스를 이용해 수년 동안 이같은 크리스마스 전쟁을 정치적 영역으로 끌어들여 도구화했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기독교인들은 이런 트럼프를 지지했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면 크리스마스를 민주당 지지자들이 더 열렬히 기다리는 건 희한한 일이다.
불편한 명절 추수감사절 건너뛰기
미국인들이 예년보다 조금 일찍 연말 분위기에 빠져들면서 기업들은 이러한 감정에 편승해 판매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도 사용자가 많은 명상 애플리케이션 ‘캄(Calm)’은 재미있게도 선거일 밤 내내 CNN, ABC에 무음 광고를 진행했다. “여러분에게 30초의 침묵을 선사하기 위해 이 광고 공간을 마련했다.” 이 광고는 선거가 끝난 후에도 CNN에서 계속 방영되었다.
가족친화적인 연말 엔터테인먼트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케이블 채널 ‘그레이트 아메리칸 패밀리(Great American Family)’는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인쇄 및 디지털 광고를 통해 다가오는 뉴욕 크리스마스 축제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광고 문구에는 스트레스 많은 시기를 벗어나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집중하자는 말이 포함되었다. 이 케이블 채널의 모회사 CEO 빌 애보트는 선거가 끝난 후 홍보 관련 인터뷰에서 현실에서 벗어나는 데 초점을 맞춘 마케팅을 할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선거 스트레스를 크리스마스 쇼핑으로 풀어보는 건 어떨까요!” 선거 당일 밤부터 판촉 행사를 시작한다는 상점들도 대거 등장했다. 소셜미디어에 선거 당일 저녁부터 선거와 유권자들의 심리를 겨냥한 다양한 상품광고들이 가득해졌다.
이렇게 핼러윈에서 크리스마스로 건너뛰는 또 다른 이유는 추수감사절이 미국인들에게 점차 불편한 명절로 바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추수감사절은 우리나라 추석과 같이, 대개 가족 모두가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들 사이에 의견이 맞지 않는 경우가 종종 나타날 수밖에 없는 까다로운 명절이기도 하다.
올해 추수감사절은 선거가 치러진 지 3주 만에 찾아온다. 최근의 미국 상황을 보면 패배한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바로 선거결과를 수긍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추수감사절이 지난 시점까지도 트럼프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던 지난 2020년 대선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올해는 대부분의 정치적 이슈에 비슷한 입장인 가족들조차 부담을 느끼고 있다. 좌파 성향의 가족들 사이에서는 미국과 전통적인 동맹관계인 이스라엘 지원에 대한 논쟁이 있다. 한편 보수적인 가족들 사이에서는 우크라이나 문제로 갈등을 겪는다. 러시아의 침략 위협을 우려하는 공화당 지지자도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비용이 많이 드는 외국 전쟁에 개입하는 것에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미국처럼 거리낌없이 개인의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는 문화가 아니라면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심적으로 불편한 명절보다는 크리스마스를 더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선거 스트레스에 대한 ‘건강한 반응’
정치와 정신건강의 관계를 연구 중인 네브래스카-링컨 대학의 케빈 스미스 교수는 사람들이 이번 선거 직후에 이런 방식으로나마 크리스마스에 기대는 것은 선거 스트레스에 대한 ‘건강한 반응’이라고 말했다. 선거 결과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또 큰 슬픔에 빠지기보다는 어떻게든 마음의 안정을 찾고 현실을 인정하고자 하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를 맞이해야 하는 내년을 위해서라도 이번 크리스마스는 다른 해보다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