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정년연장’보다 먼저 해야 할 일
얼마 전 만65세를 맞아 정년퇴직한 대학교수가 미국 유학시절 지도교수에게 퇴임을 신고하는 전화인사를 했다. 80대 초반의 미국인 스승이 이렇게 말했단다. “나도 아직 강단을 지키고 있는데 자네가 정년이라니 무슨 얘긴가?” 대부분 60세에 직장을 떠나야 하는 한국에서 그나마 ‘장수(長壽)’가 보장된 대학교수들도 정년에 따른 스트레스가 적지 않다. 미국 은사(恩師)에게서 들은 얘기가 그래서 더욱 부러웠던 모양이다.
공무직 근로자 정년연장 조치로 사회전반 ‘65세 정년' 논의 본격화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정년제도 자체가 없다. 직장에서 역량을 인정받은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계속 일할 수 있다. ‘성(性)·인종·학력·외모 등과 마찬가지로 나이에 의한 차별도 안된다’는 판례가 확립된 덕분이다. 대학교수들도 ‘테뉴어(tenure, 평생고용 보장)’ 심사를 통과하면 종신재직 권리가 주어진다.
그렇다고 마냥 대학에 남아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고령으로 인해 연구나 강의 등의 실적이 부진해졌다 싶으면 대학당국으로부터 갖가지 무언의 압력을 받는다. 젊은 후배교수들의 눈치도 사나워진다. 정년이 없는 미국이라고 해서 한정된 일자리를 놓고 벌어지는 세대 간 갈등이 없을 리 없다.
요즘 한국 사회가 ‘정년연장’ 문제로 소란하다. 행정안전부가 지난달 본부와 소속기관에서 근무하는 공무직 근로자 2300여명의 정년을 만 60세에서 최대 만 65세로 늦춘다고 발표하면서 사회 전반의 정년연장 논의가 본격화됐다. 저출생 고령화가 계속되면서 ‘연금 조기고갈’ 위기에 빠진 정부가 지난 9월 국민연금보험료 의무납부 기한을 만 59세에서 64세로 늘리는 방안을 내놓은 게 발단이 됐다. 60세 이상의 나이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치권의 공약 경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야당이 이미 ‘65세 정년법안’을 내놓은 가운데 여당도 관련 법안을 곧 공표하기로 했다.
평균수명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60세 정년’ 연장 논의는 불가피하다. 일본은 이미 재고용 정년연장 정년폐지를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해 65세까지 고용하는 기업을 전체의 99.9%(31인 이상 사업장 기준)로 끌어올렸다. 독일 프랑스 등도 정년을 최대 67세까지 늘리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일자리 ‘총량’이다. 정년이 늦춰지는 만큼 젊은 세대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선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4~6월) 청년층의 신규 채용 일자리(145만4000개)가 작년 같은 기간보다 8.6% 줄었다. 젊은 세대에 정년연장 논의가 달가울 리 없는 이유다.
정치권이 이념과 정파 뛰어넘어 실사구시로 해답 찾아야
정년연장은 기업들에도 적잖은 부담거리다. 직원들의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적으로 올라가는 연공급제(호봉제)가 지속되고 있어서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근속 30년 이상 직장인의 임금이 1년 미만 직장인의 4.4배에 달한다. 60세 직원 한명에게 줄 월급으로 4명 이상의 젊은 사원을 채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게다가 일단 직장에 들어온 사람은 아무리 근무성적이 나빠도 쉽게 내보낼 수 없게 돼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세계경제포럼(WEF) 등의 국가별 고용·임금 유연성 평가에서 한국이 가장 경직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지가 꽤 됐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둔 채 정년을 연장하기는 쉽지 않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친(親)노동’을 공언하면서도 ‘호봉제 대신 하는 일에 따라 급여를 차등 지급하는 직무급 도입’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이유다. 하지만 최대 노동자단체인 민주노총이 반대하자 곧바로 접었고, 현 윤석열정부도 제대로 손을 대지 않고 있다.
결국은 선택의 문제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해법을 제시해 현안을 해결해내는 게 정치의 역할이고, 정부와 국회의 몫이다. 정년연장이야말로 정치권이 이념과 정파를 뛰어넘어 ‘실사구시’로 해답을 찾아내야 할 ‘발등의 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