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보건 선진국으로 가는 길
시스템 부조화로 새 나가는 산업안전 재정
2011년 정부의 산업안전 재정지원 사업이 신문을 통해 문제 제기됐다. 소형사업장을 대상으로 재해예방에 필요한 물품 비용의 전액 또는 일부를 정부가 지원하는 당시 연 500억원 규모의 클린사업이다. 재해예방을 위한 사업장 지원은 법에 정한 정부의 책무에 해당한다. 당시 기자도 정부의 재정지원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지원 품목 중 LED 전광판의 경우를 들어 재정낭비를 문제 삼았다. 원가 70만원 정도의 제품에 220만원이 지급되는 것을 지적했다. 다음 년도에 해당 물품이 지원품목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그 사건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재 클린사업 1500억원을 포함해 정부의 산업안전 재정지원 사업은 1조원 이상으로 확대돼 집행되고 있다.
클린사업은 1990년대 말에 소규모 작업장의 3D 즉 위험하고(Danger) 어렵고(Difficult), 비위생적인(Dirty) 작업환경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사업으로 시작됐다. 정부는 지원 대상과 예산 등 큰 틀의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 품목과 방식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안전보건공단이 집행해왔다.
각기 다른 목적의 시스템 참여자들
그런데 두기관은 모두 사업의 동력인 사업장의 자발적 수요를 고려하지 못했다. 지원 대상인 소규모 사업장들은 안전관리자 선임 등 많은 법적 의무가 면제됐고 정부의 지도감독도 부족하다. 전체 중대재해의 과반수가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하지만 확률상 개별사업장의 사고 경험은 500년에 한건이 되지 않다 보니 대다수 사업주의 안전의식은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사고예방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그들에게 자발적 요청은 기대하지 않았어야 했다.
재정 지원의 목적은 재해예방이다. 정부 홍보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신청이 없자, 안전공보건공단 실무진은 예산 소진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고, 소규모 사업장 지원이라는 명분 유지가 우선인 담당 부처도 재해예방 성과에 소홀했다. 이 과정에 지원대상 물품의 생산자와 유통자가 사업 시스템에 끼어들어 그들의 금전적 이익이 사업의 실질적인 동력이 됐다.
그 결과 효과 미상의 품목, 부풀려진 물품 가격, 명판과 다른 저급 제품, 사업장들의 신청을 받아 내기 위한 페이백(뒷돈), 심지어 물품 하나로 여러 사업장 돌려 막기까지 벌어지며 지원을 받은 사업장에게도 빈축을 사는 사업이 됐다.
2004년 정부 경영평가에서 평가위원이 요구한 재해예방 성과의 객관적 입증자료를 제출하지 못해 0점 처리된 일이 있었음에도 정부의 재정지원은 성과가 미지수인 상태로 집행되고 있다.
안전의식 기반 자발적 참여가 필수
유럽연합(EU) 국가들도 공공 재정을 들여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보건을 지원한다. 그들은 사업장의 자발적 신청을 기반으로 물품보다 컨설팅 위주로 지원한다. 오스트리아 AUVA(산재예방 및 보험담당 기관)는 신청 사업장의 특성과 요구에 적합한 컨설팅 인력을 직접 선별해 지원한다.
그들은 안전의식에 기반을 둔 사업장의 자발적 노력을 유인하기 위해 세금 보험료 등의 인센티브 제도 운영에 더해 지도감독 등 공적 행정력 대부분을 소규모 사업장에 투입한다.
우리도 소규모 사업장을 대상으로 연간 약 2000억원 규모의 각종 안전보건 컨설팅을 지원한다. 그러나 이 사업 역시 대상 사업장의 자발적 요청이 아닌, 민간 수행자들 주도로 수행되고 있어서 사업장의 수용 정도가 의문이다. 그나마 수용도를 높이려면 수행자의 역량과 컨설팅 방식이 중요한데 그 부분도 적절히 관리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한 예로 안전보건확보 체계 구축 지원 사업의 수행 자격에 노무사가 들어 있다. 생산과 안전에 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노무사라면 모를까, 노무사 자격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무리다.
혹여 대다수의 직원들이 근무경력으로 노무사 자격을 갖게 되는 담당 부처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면, 사적 이기심을 그렇게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그 조직은 사업주들에게 안전의식을 얘기할 자격이 없지 싶다.
우리나라가 산업재해 예방에 수조원의 재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중대재해 감소 성과를 얻으려면 안전의식에 기반한 소규모 사업장의 자발적 참여가 가장 우선적인 필수요소다.
대형 현장 사고예방을 방해하게 되는 정부의 산업안전 감독은 사고 경험이 없는 소규모 사업장에 집중해서 그들에게 안전이 중요하고 필요한 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법에 정한 정부 책무의 기본이다.
고재철
법무법인 화우 고문
전 안전보건공단
안전보건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