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정치가 깨어나야 경제도 산다
정치권 발(發) 혼돈이 또다시 온 나라를 덮쳤다. 윤석열정부가 출범 2년 7개월 만에 대통령 탄핵으로 ‘대행’ 체제에 들어갔고, 차기 대선을 둘러싼 여야 정치권의 힘겨루기까지 더해지면서 정국이 짙은 안개 속에 휩싸여있다. 가뜩이나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던 경제가 입고 있는 충격이 특히 심각하다. 시장이 가장 싫어한다는 불확실성이 극단적으로 높아지면서 기업들은 코앞으로 다가온 새해 사업계획의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주식 외환 등 주요 시장도 정치권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시황이 요동치는 갈지(之)자 장세가 이어지고 있다.
정상적인 정부기능이 작동하지 못하는 데 따른 국내외 투자자들의 걱정이 크다. 강력한 자국우선주의를 예고한 미국의 트럼프 2기 정부가 다음달 출범하는 등 대외통상환경이 급변하고 있는 시점이어서 더욱 그렇다. 기업을 비롯한 시장참가자들의 시선이 향후 정치일정에 쏠리고 있는 이유다. 국민들의 불안을 씻어내고 산적한 국가현안들을 안정감 있게 해결해 낼 정치질서 회복이 시급하다.
정부의 실패, 국가 전체 괴멸로 몰아넣을 수 있어
바로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짚어봐야 할 게 있다. ‘정치’란 무엇이며,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왜 필요한가 하는 원론(原論)이다. 정치철학 시조로 꼽히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인간의 우수성과 미덕을 발전시키는 것이 정부의 목적이어야 한다”고 설파했지만 인류 역사에서 그런 이상(理想)을 제대로 이뤄낸 정부는 많지 않다. 오히려 그가 우려했던 금권(金權)정치와 중우(衆愚)정치, 폭정으로 치달으며 역사에 오점을 남긴 사례가 수두룩하다. 정치의 실패, 정부의 실패는 국가 전체를 회복하기 어려운 괴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린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나쁜 정부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는 무정부주의가 한때 세상을 풍미했던 배경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4만4200달러(2023년)에 달하는 유럽 경제강국 벨기에에서 일어났던 일이 요즘 회자되고 있다. 이 나라는 2010년 양대 민족인 네덜란드계와 프랑스계 간 갈등으로 연방정부가 붕괴된 뒤 541일 동안 공식정부가 출범하지 못하는 기록을 세웠고, 2014년에도 총선 이후 5개월간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해 ‘무(無)정부’ 상태에 빠진 전례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기간 동안 경제활동을 비롯한 국민들의 일상이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는 “벨기에는 무정부 상태가 경제에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며 “오히려 정부의 비효율적 의사 결정 등 ‘정부 실패’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 경제가 선순환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인구 1100만명 남짓한 소규모 국가의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곱씹어볼 만한 얘기다.
정치와 정부가 실패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선거제도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보다 많은 지지를 받아야 집권할 수 있으므로 유권자들 입맛에 맞춘 ‘포퓰리즘’ 공약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다. 아르헨티나 그리스 같은 나라들 말고도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선거가 거듭되면서 쌓인 포퓰리즘 잔해와 씨름하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다.
다음 선거만 생각하는 정치꾼 득세하면 안돼
그렇다고 모든 정치인들이 포퓰리즘 덫에 빠지지는 않는다. 지지계층과 지지기반을 배려하는 정책을 추구하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정치지도자들이 많다. 나라 전체의 앞날을 최우선적인 고려대상으로 놓고 지지자들을 설득해가며 인기 없는 정책 결단을 내린 지도자들도 적지 않다. 정치적 기반이었던 노동조합 지도부를 설득해 취약계층 보호를 강화하는 대신 고용유연성을 높이는 대타협(하르츠개혁)을 이끌어낸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역시 진보정치인이었던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도 ‘일자리 복지’를 위해 국적을 따지지 않고 기업들의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정책에 총력을 기울였다. 진보학자였지만 합리주의자였던 로버트 라이시 하버드대 교수를 노동부장관으로 임명하고는 “기업 국적은 누가 주인이냐(owned by)가 아니라 어디에 소재(based on)해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며 1990년대 초반 미국 사회에 팽배해있던 외국계 기업 배척심리를 설득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대한민국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소규모 개방경제국가인 한국이 지속 발전하려면 무역시장 기반을 더 넓혀야 한다”며 지지자들이 극력 반대했던 한미자유무역협정 체결을 밀어붙여 한국이 세계 6위의 무역대국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다졌다. “정치가(statesman)는 다음 세대를 생각하지만, 정치꾼(politician)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한다”는 정치권의 세계 공통 격언을 모두가 되새겨야 할 때다.
이학영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