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트럼프 2.0 시대에 비상 걸린 영국

2024-12-19 13:00:02 게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가 다음달 20일 취임 예정인 가운데 세계 각국이 대비책을 마련하느라 부산하다. 특히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를 내세워왔던 영국은 그의 오른팔이 된 일론 머스크와 관계가 껄끄러워 곤혹스럽다. 영국의 노동당정부는 머스크와 관계를 개선하려 하면서 트럼프와는 당선 이전부터 접촉을 해왔기에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한다.

트럼프의 최측근 일론 머스크와의 악연

트럼프 지지에 발벗고 나섰던 세계 최고 갑부 머스크는 X(트위트)에서 2억명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린 최강 인플루언서다. 그런 그가 영국과 관련해 허위 트윗을 계속 날렸다. 8월 22일 X에서 그는 “영국정부가 어린이 성폭행범도 조기 석방한다”고 썼다. 7월 4일 정권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정부는 교도소 수용률이 99%가 넘자 5500명의 수감자를 조기에 풀어줬다. 단 성폭력범과 살인자 테러범 등 흉악범은 제외됐다.

단순한 사실 확인만으로도 알 수 있는데 머스크는 한달 뒤에도 동일한 거짓을 또 올렸다. 9월 26일 포스팅에서 그는 “SNS에서 글을 쓴 사람들을 투옥하기 위해 어린이 성폭행범을 석방시키는 영국에 그 어느 누구도 방문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영국이 X를 통제하려는 데 대한 보복이다.

성마른 성격의 그가 영국을 집중공격하는 것은 경제적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영국은 지난해 온라인안전법을 제정했고 내년 초부터 이 법이 발효된다. X나 메타와 같은 거대 플랫폼에 해로운 내용을 감독하고 삭제할 의무를 부과했다. 유럽연합(EU)이 디지털서비스법 위반혐의로 X를 조사중인 것과 유사하다. 영국 하원의 과학기술위원회 일부 의원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유포하는 머스크를 청문회에 불러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경제적 손실 이외에도 머스크는 또 트럼프 같은 권위주의적 지도자를 좋아하는 성향을 보여왔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 후 노동당정부는 자존심을 억누르고 머스크와 접촉중이다. 토니 블레어 전 노동당 총리와 보리스 존슨 전 보수당 총리가 머스크 및 그의 인사들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블레어 전 총리가 운영중인 ‘토니블레어연구소’는 머스크의 스타링크와 함께 아프리카 말라위와 르완다에서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지상에서 550㎞ 상공에 저궤도 위성을 띄어놓고 광케이블 설치가 어려운 지역에 위성을 활용해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스타링크다. 경제성장을 최우선 정책으로 제시한 노동당은 이런 인맥을 바탕으로 머스크와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트럼프와의 관계를 도모하는 데 머스크가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와의 관계는 머스크와 비교하면 나은 편이다. 지난 9월 말 유엔총회에 참석중이던 키어 스타머 총리는 트럼프 후보와 2시간 만찬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데이비드 라미 외무장관도 동석했다. 스타머 총리는 만찬 후 “두 나라 간의 오래된 우의를 강조하고 계속해서 강력하고 지속적인 양국 관계 발전이 중요함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라미 외무장관은 야당의원이었던 2018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을 “독재자, 여성을 혐오하는 신나치 동조자이자 소시오패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었다. 이날 모임에서 트럼프와 노동당정부는 이런 오해를 풀고 서로 협력해 나가자고 의견을 모았다.

영국은 트럼프의 관세부과와 관련한 대책을 마련중이다, 지난해 영국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721억파운드(약 131조여원) 흑자를 기록했다. 트럼프가 공언한 대로 중국에 60%, 나머지 국가에 10~20% 관세를 부과할 경우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절반 정도 깎일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경제사회연구소는 관세전쟁이 벌어진다면 내년 경제성장률이 0.7%p, 2026년 0.5%p 낮아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영국은 지난달 6일 트럼프의 재선이 확정된 후 트럼프 진영과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금융서비스와 의약품 등 주요 수출품 비중을 줄이고 미국산 상품과 서비스를 더 많이 수입하는 방향으로 협상을 진행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양자협상을 선호하는 트럼프는 영국은 물론이고 대미 무역흑자가 많은 EU 측과도 유사한 대화를 진행중이다. EU는 올 초부터 ‘트럼프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어떤 미국 상품을 더 수입할지 구체적인 안을 작성했다.

미국과 영국 ‘특별한 관계’ 지속될 듯

무엇이 특별한 관계인가는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쟁이 분분하다. 그렇지만 정보교류 측면에서 영국은 다른 우방국들보다 미국과 더 특별한 관계다. 영어를 사용하는 미국과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의 ‘파이브아이즈(Five Eyes)’ 국가들은 서로를 염탐하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교류해왔다.

이 가운데 영국과 미국은 2차대전 후부터 오래된 정보교류 전통을 유지해왔다. 상대국 수도에 주재중인 정보당국 관계자가 상대국 정보회의에 참석한다. 런던에 주재한 미국 중앙정보국(CIA), 워싱턴D.C.에 근무중인 영국 대외정보국(MI6) 주재관이 상대방과 수시로 고급 정보를 교류한다. 2차대전 후 자유진영의 지도자가 된 미국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등 현지 정보가 부족했다.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이 이런 부족함을 대인정보(휴민트)로 보충해줬기에 양국의 이런 정보교류가 가능했다.

트럼프 1기 때 MI6 국장으로 근무하면서 정보교류를 지켜본 알렉스 영거(Alex Younger)는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부 우려를 표명했다. 지난달 초 미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DNI) 국장으로 털시 개버드(43) 전 하원의원이 지명됐다. 그는 ‘친러시아·친시리아’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여러 차례 비판받던 인물이다. 영거 전 국장은 그럼에도 미국이 영국과의 고급정보 교환에서 얻는 이득이 여전하기 때문에 양국의 특별관계는 지속되리라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트럼프 1기 때 영국 정보당국은 성향이 다른 미국의 새 정부에 적응하느라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트럼프 1기 때 경험을 축적했기에 미 정보당국의 수장이 바뀌어도 그간 축적된 네트워크와 노하우를 충분하게 활용할 수 있다.

노동당정부 실용외교에 보수당도 지원

영국은 보수당, 노동당을 막론하고 실용주의 외교정책을 펴는 특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노동당정부는 보호무역에 앞장서고 동맹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는 트럼프에 내심 불편해 한다. 하지만 현실을 인정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국익이라는 공감대가 있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영국과의 특별관계를 고려해 관세 협상에서 영국에게 좀 더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겠냐는 희망어린 바람도 제기한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들은 트럼프 성향상 영국에게만 유리한 딜을 할 가능성이 낮다고 예상한다.

이런 실용적인 외교 노선에 야당이 된 보수당도 공감한다. 지난 7월 총선에서 노동당에 2/3 의석에서 1석 모자라는 하원의석을 내줘 대패를 겪은 보수당은 지난달 초 신임 대표를 선출했다. 나이지리아계 흑인 여성 케미 베이드녹(44)이다. 영국 주요 정당에서 흑인 여성이 대표에 오른 것은 처음이다. 그는 이민통제 강화를 요구하며 극우정당 영국개혁당이 빼앗아간 보수 유권자의 표를 되찾아오려고 노력한다.

영국의 EU탈퇴, 브렉시트 운동의 주역이던 나이젤 파라지는 올해 총선을 앞두고 영국개혁당을 만들었다. 7월 총선에서 이 정당은 14.3%의 지지를 얻어 보수당 대패에 큰몫을 담당했다. 소선거구제도에서 영국개혁당은 하원에서 5석을 얻는 데 그쳤지만 의회 개원 후부터 보수당을 압박했다. 신임 보수당 당수는 하원 토론에서 라미 외무장관의 트럼프 비판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장애물이 된다고 지적했을 뿐, 노동당정부의 트럼프 접촉을 지지했다.

세계 각국이 트럼프 2.0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우리도 하루빨리 정치적 불확실성을 제거해 트럼프 태풍에 맞서야 한다.

안병억 대구대 교수,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