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쌓기-궁즉통에서 ‘디자인 사고’까지
혁신적 아이디어는 궁지 몰렸을 때 탄생 … 이케아의 쇼룸, 아이폰의 모서리 사례
그날 새벽 필자는 온몸의 감각을 총동원해야만 했다. 2년 3개월 전 아일랜드 더블린의 한 호텔방에서의 일이다. 전날 밤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근처에서 흑맥주를 마신 사내가 눈뜨자마자 불현듯 시계를 찾는다. 스마트폰의 전원버튼을 누르지만 기기는 반응하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직감한다. 노트북을 켜 간신히 시간을 확인하고 간밤을 톺는다. 기억의 조각을 맞춘다고 죽은 액정이 깨어나지는 않는다.
이제 스마트폰은 없다. 아일랜드 더블린에 들른 이유는 잉글랜드 노스햄프턴으로 가기 위해서다. 대학교 친구 영국인 ‘매튜’의 결혼식에 가는 도중에 순례길 친구 아일랜드인 ‘브라이언’을 만났다. 브라이언과 마신 흑맥주는 분명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꽤 씁쓸했다.
런던행 비행기 탑승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호텔 방에서 노트북부터 충전하며 더블린에서 런던으로 가는 전자항공권을 PDF 파일로 다운받았다. 더블린 시내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표도 구매해 QR코드를 저장했다. 호텔에서 공항버스를 타러 가는 길은 구글 지도를 켜놓고 종이에 중요한 지형지물을 메모했다.
QR코드를 스캔하려는 버스 기사에게 커다란 노트북 화면을 들이댔더니 황당해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런던 루턴 공항 버스터미널에서 다시 노트북 화면을 열어 승차권을 보여주자 노스햄프턴행 기사도 비슷한 당혹감을 표출했다. 웃음으로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혁신은 궁즉통(窮則通)’이라는 명제를 떠올렸다.
가구회사 이케아 성공비결은 궁즉통
혁신은 궁즉통이다. 궁하면 통한다. 많은 혁신적 아이디어가 궁지에 몰렸을 때 탄생했다. 세계 최초로 스마트폰 기반 신용카드 리더기를 만든 핀테크 기업 ‘스퀘어’의 공동창업자 짐 메켈비의 책 ‘언카피어블’을 봐도 그렇다. ‘언카피어블’의 영어판 원제는 ‘혁신쌓기(The Innovation Stack)’다.
메켈비는 책에서 어떤 산업을 들여다봐도 ‘혁신쌓기’의 동일한 패턴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 패턴이란 이렇다. “한 기업가가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여정을 시작한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줄줄이 생기고 그에 따라 혁신이 쌓인다. 축적된 혁신은 다른 기술과 결합해 세상을 바꾸는 기업이 탄생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궁즉통의 반복’과 다름없다. 메켈비는 대표 사례로 ‘이케아’를 소개한다.
이케아는 열일곱살 소년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가 창업한 회사다. 자신의 이름 이니셜과 자신이 거주한 농장(Elmtaryd)과 근처 마을(Agunnaryd)의 앞글자를 따 이케아를 세운다. 이케아는 처음 성냥갑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팔다가 통신판매 회사가 되었다. 카탈로그를 보고 고객이 구매 신청서를 보내면 가구를 배달해주는 방식이었다. 처음 이케아의 전략은 최저가였다. 경쟁업체보다 조금씩 가격을 낮춰서 제품을 시장에 내놓으며 인지도를 쌓았다. 이는 곧 다른 가구 판매회사의 반발을 불렀다. 이케아는 1950년부터 가구 박람회 참가가 금지되었다.
궁지에 몰린 캄프라드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세인트 에릭 박람회장 근처에 공간을 빌려 이케아 가구를 전시했다. 이케아를 상징하는 ‘쇼룸’ 방식이 움트는 순간이었다. 박람회 전시 자격을 박탈당한 회사가 궁금했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캄프라드는 아예 낡은 건물을 사들여 상설 가구 전시장을 마련했다.
이케아의 정체성이 형성되면서 경쟁자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스웨덴 가구 판매업자들은 이케아와 거래하는 공급업체를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캄프라드는 하릴없이 스웨덴 밖에서 제조 공장을 물색해야만 했다.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싸고 자원이 풍부한 폴란드가 대안이었다. 이케아는 폴란드에서 스웨덴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우수 인력을 고용할 수 있었다.
애플이 기술만큼 디자인을 강조한 이유
주변 환경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스스로 환경을 설정하는 회사도 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혁신을 창조하는 기업이다. 애플이 그렇다. 애플은 1983년 아무도 볼 일이 없던 컴퓨터 내부 회로기판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만들 때까지 매킨토시의 출시를 보류했다.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숨어 있는 부분까지 아름다운 완벽한 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자기 자신과 구성원을 궁지로 몰았다.
엔지니어 한명이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반발했다. “중요한 건 제품이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입니다. PC 회로기판을 들여다볼 사용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잡스가 대답했다. “훌륭한 목수는 아무도 안 본다고 생각해서 장롱 뒤쪽에 저급한 나무를 쓰지 않습니다. 밤잠을 제대로 자려면 아름다움과 품위를 끝까지 추구해야 합니다.”
창업자의 철학을 바탕으로 애플 디자인팀은 엔지니어팀보다 더 큰 권한을 갖는다. 아름답고 완벽한 디자인을 제시하면 이를 기술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게 엔지니어의 몫이다. 1990년대 말 파산 위기에 처했던 애플의 부활을 이끈 인물도 다름 아닌 ‘디자이너’ 조니 아이브(Jony Ive)다. 잡스가 심미적인 회로기판에 집착했다면 아이브는 아이폰의 둥근 모서리에 천착했다. 아이브의 디자인팀은 아이폰을 설계하며 직선 면과 곡선 면 사이의 전환 시 생기는 단절을 없애기 위해 완벽을 기했다.
일반적으로 둥근 모서리는 원을 사등분한 사분원을 적용한다. 아이브는 더욱 완만하면서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의 디자인팀은 12개의 점을 사용해 아치형 곡선을 만들었고 이를 아이폰에 탑재한다. 2020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는 디테일까지 완벽을 기한 단적인 사례로 아이폰의 모서리 ‘스쿼클(Squircle)’을 제시했다. 한발 더 나아가 조니 아이브는 섬세하게 만들어진 아이폰 하드웨어의 모서리와 소프트웨어의 투박한 모서리의 차이까지 단번에 알아봤다. 그의 관할이 아니었던 아이폰의 앱에도 스쿼클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소프트웨어팀을 설득할 정도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애플은 모두가 디자이너인 조직이다. 애플 수석 디자니어였던 마크 카와노는 2014년 기술 매체인 소프트피디아와 인터뷰하며 “애플에서는 모두가 디자이너(Everyone at Apple is a designer)”라고 말했다. 애플에서는 전통적 디자이너뿐 아니라 엔지니어도 사용자경험(UX)을 생각해 제품을 구상하고 개발한다는 뜻이다.
막다른 골목 몰렸을 때 새로운 이치로
애플이 지향하는 인간 중심의 디자인 철학은 어디서 왔을까. 기획자 엔지니어 마케터를 막론하고 ‘모두가 디자이너인 조직’은 과연 어떻게 탄생했을까.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를 스티브 잡스의 독창적 접근법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애플의 창업과 비슷한 시기에 노벨상을 받은 사상적 스승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허버트 사이먼은 디자인을 하나의 과학(science)으로 정립하려 시도한 최초의 학자다. 그는 인공물을 만드는 엔지니어는 물론이고 약사 회사원 행정가도 ‘창조 활동’을 한다는 점에서 디자이너라고 봤다. 사이먼은 자신의 저서 ‘인공과학(The Sciences of the Artificial)’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엔지니어만 전문적 디자이너인 것은 아니다. 기존 상황을 낫게 변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행위를 궁리(devise)하는 사람은 누구나 디자인을 하고 있다. 물질적인 인공물을 제작하는 지적인 활동은 환자를 위해 치료법을 처방하거나, 회사를 위해 새로운 판매계획을 궁리하거나, 국가를 위해 정책을 궁리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궁즉통과 궁리(窮理)는 같은 ‘궁(窮)’ 자를 쓴다. 다할 궁, 궁할 궁이다. 옥편을 펼친 김에 국어사전도 찾아본다. 다하다는 ‘어떤 것이 끝나거나 남아 있지 아니하다’는 뜻이다. 궁하다는 ‘난처하거나 막혀 피하거나 변통할 도리가 없다’는 의미다.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는 새로운 이치를 디자인해야만 한다. 이케아의 쇼룸, 아이폰의 모서리가 이를 증명한다. 노트북을 거대한 스마트폰으로 활용해야 했던 필자의 궁여지책도 ‘디자인 사고’에 해당한다고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