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수찬 칼럼

혁신을 위한 한국경제의 거버넌스

2024-12-24 13:00:01 게재

내년 한국경제에 대한 전망이 최근 갈수록 내려가고 있다. 특히 5대 재벌그룹의 주력 기업들이 모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상된다. 계엄령사태 이후 국내정치의 불안도 한몫을 차지하지만 글로벌 정치와 경제 환경의 변화가 더 큰 요인이다.

글로벌경제를 보면 미국만 홀로 호황을 맞고 있으며 유럽과 동아시아 등 다른 지역들은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미국경제의 강세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아무래도 혁신이다. 혁신에는 두가지 필수요소가 있다. 하나는 사업화할 수 있는 과학기술과 노하우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화에 따르는 위험을 회피하지 않는 자본이다. 미국이 혁신을 주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일본과 중국이 한때 미국을 따라잡나 했지만 결국 실패한 것은 제대로 된 혁신생태계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위험감수 민간자본이 없거나 무력했다.

한국경제가 내년에 그리고 단기적으로 어려울 게 예상되지만 이보다 걱정해야 할 것은 불안한 장기전망이다. 경제가 장기적으로 탄탄한 길을 가려면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이 일어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거버넌스다. 거버넌스는 운영체제인데 시스템적인 측면도 있지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데는 리더십도 중요하다. 경제의 거버넌스에는 두개의 축이 있다. 하나는 공공부문의 거버넌스 곧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경제의 거버넌스다.

단기적으로 한국정치에 희망 보이지 않아

먼저 정치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한국정치를 이야기할 때 흔히들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교대로 정권을 잡아온 역사를 떠올린다. 이러한 관점은 이제 수명을 다 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제 어느 세력이 정권을 잡느냐에 관계없이 한국의 운영체제가 되었다. 현재의 양대정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세력을 보수와 진보세력으로 표현하기도 하나 둘다 퇴행적인 기득권세력일 뿐 미래지향적이지 않다. 혁신경제를 뒷받침할 새로운 세력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한때 제3세력 움직임이 있었지만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지난 정권은 소득주도성장론으로 대표되는 재앙수준의 엉터리 경제정책을 펼쳐서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는데 팬데믹 사태로 다행히 그 과오가 묻혀졌을 따름이다. 이번 정권은 연구개발예산 대폭 삭감으로 대표되는 반혁신 정책을 ‘입틀막’으로 상징되는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서 그 부정적 영향이 상당기간 남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엉뚱한 계엄령사태를 일으켜 최소한 내년 전반기까지는 경제가 싫어하는 정치불안이 계속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음 정권은 혁신지향적인 세력이 되는 게 국민의 바람이겠지만 혼란스런 과도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준비된 세력이 집권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이렇게 보면 단기적으로는 기존 한국정치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안정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개발도상국이 아닌 선진국 한국에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가 능력을 발휘하며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가 이렇게 말하면서도 당위적인 이야기일 뿐 실현가능한 로드맵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답답하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니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뭔가 극적인 돌파구가 나타났으면 하고 바랄 따름이다.

다음은 시장경제의 거버넌스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과거에도 현재도 한국경제는 재벌체제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투자자본이 부족했던 한국의 고도성장기에 반도체 자동차 조선 화학 등 한국의 주력산업이 성장하는 데 재벌체제가 유효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재벌체제는 이제 한국경제의 혁신에 장애가 되고 있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몇몇 패밀리가 수 많은 기업들을 선단처럼 거느리며 국가경제를 좌지우지하는 후진적 현실은 타파되어야 한다. 거대재벌의 창업자 집안이 많은 기업들을 정상적으로 지배할 지분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경제를 운영하라고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적도 없다. 필자는 십여년전에 ‘유전자 자본주의와 연기금 자본주의’ 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한국의 현실에서 정부의 영향력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연기금 자본주의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자라나야 할 혁신생태계를 무자격 재벌승계자들이 망가뜨리고 있는 유전자 자본주의는 더 문제라는 점을 얘기했다.

혁신생태계 망가뜨리는 후진적 재벌체제

정당성이 없고 합리적 존재이유가 없는 거대재벌들은 해체되어야 한다. 주력기업들은 당해기업의 주주들이 힘을 모아 기업가정신을 가진 전문경영인들이 경영하도록 전환하고, 지배적 지주회사는 해체하거나 꼭 필요하다면 투자를 결정하는 자산운용사로 전환해야 한다. 혁신역량도 없이 그저 재벌의 힘으로 중소기업들의 영역을 잠식하던 계열사들은 정리하면 된다.

내년 한국경제의 전망이 밝지는 않지만 이럴 때가 오히려 장기적 관점에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혁신을 위한 경제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카이스트 교수

경제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