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빈말이라도 “제대로 계엄” 말하지 말기
지난 12월 3일, 난데없는 비상계엄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심야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과 국회의 신속한 대처 덕분에 천만다행 계엄이 해제됐다.
공포와 충격의 그 밤이 지나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충격이 잠시 가시니 간밤의 계엄은 한바탕 소동으로 치부됐고 술자리 안주에 올랐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모임에서 한마디씩 나온 이야기. “아니, 이왕 할거면 제대로나 하지, 이런 허술한 계엄은 생전 처음 보네.”
안 그래도 맘에 들지 않던 윤석열 대통령과 그가 설계한 쿠데타를 비아냥거리는 농담이겠지만 한켠에선 섬뜩한 생각이 든다. 만약 저들이 보다 치밀하게 준비해서 ‘제대로’ 계엄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72년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의회가 강제 해산됐고 언론자유가 사라졌다. 정치인 언론인 활동가 등 수많은 시민이 체포되고 고문을 당했다. 국제엠네스티에 따르면 계엄 기간 필리핀에선 7만명이 투옥됐고 3만4000명이 고문을 받았으며 32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계엄령과 독재는 인권유린뿐 아니라 필리핀 경제까지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계엄 이전 한국보다 2배 가까이 높았던 필리핀의 1인당 GDP(198달러)는 계엄령이 해제된 1981년 한국의 절반이 됐고, 2023년에는 1/10까지 추락했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미얀마 군부는 2021년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족주의연맹이 선거에 승리하자 선거부정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세기 최악의 계엄은 독일 히틀러가 취한 국가 비상사태 선포다. 히틀러의 계엄은 2차대전까지 이어지며 유대인 집시 러시아인 등 약 1000만명 이상을 학살했다. 독재자의 집착은 독일 경제를 추락시켰고 전쟁 피해 보상금은 후손에게 대대로 부담을 줬다. 이처럼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은 불과 70년 전이다.
지금 수사기관에선 “그냥 경고나 한번 주려고 했다”던 윤 대통령의 계엄이 전혀 ‘어설픈’ 시도가 아니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적 계엄에 반대하는 ‘상식적’ 군인들과 그 밤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모인 시민들이 막았을 뿐이다.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했어야지라고? 오죽하면 계엄을 했겠냐고? 아무리 야당이 미워도 아무리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말자. 체포조 암살조 얘기가 나오고 있다. 준비한 실탄만 1만발에 달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계엄이 제대로 실행됐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은 없다. 중과부적으로 계엄에 실패했다는 국방부장관의 한탄이 “다음번엔 결코 실패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이제형 자치행정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