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2025 을사년 일본, 그리고 한국은
한해를 마무리할 때 일본 사람들은 고향집에 모여 가족과 친족끼리 회포를 풀고 인사를 나눈다. 새해로 넘어가는 시간대에 도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를 먹는 건 긴 메밀면을 통해 장수를 기원하고 잘 끊어지는 메밀처럼 지난해의 나쁜 운이 끊어지고 새해 좋은 운이 들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새해 연휴 동안 여성들은 집안일을 하지 않기에 차가운 도시락 요리인 오세치 요리를 먹는데 여기에는 새우가 반드시 들어간다. 새우는 장수를 상징한다.
한국에서야 떡국은 지금도 음력 설날에 먹는 것이지만 일본은 근대화 이후 태양력 기준으로 전통문화를 바꾸었다. 메이지유신 직후인 음력 1872년 11월 29일을 양력으로 1873년 1월 1일로 변경하고 서양과 동일한 시간체계를 세웠다. 음력 칠월칠석 문화를 양력 7월 7일에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본의 불황 30년 견디게 한 ‘편리주의’
한국의 양력은 어떠했나. 1895년에 고종이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선포하고 시간은 ‘한성 기준시’로 일본과는 30분 2초의 시차를 두었다. 그리고 양력 첫날부터 조선왕조 첫 연호를 건양(建陽)으로 했다. 말 그대로 양력을 세운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를 주도한 쪽은 고종이 아니라 을미사변이란 내란을 일으킨 일본과 친일파 내각이었다.
이들이 실시한 태양력 변경은 근대화보다는 민족전통 파괴로 여겨졌기에 한국 사람들은 음력을 더 소중히 여겼다. 1895년 을미년에서 10년이 지난 1905년 을사년에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으로 한국을 보호국으로,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1965년 을사년 한일국교정상화가 되었고 다시 60년이 흘러 을사년이 온다. 이제는 한국도 변하고 일본도 변했다.
일본의 양력 도입으로 상징되는 편리주의 혹은 실리주의는 일본경제를 움직이는 힘이기도 하다. 편리주의는 일본의 상인정신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편리한 편의점(콤비니) 시스템을 갖춘 나라이기도 하다.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 로손 등 콤비니업계의 매출액은 2022년에 약 120조원 규모로 전 상업 매출의 25% 규모다(한국은 약 12조원, 16%). 그리고 다이소 드럭스토어 돈키호테 빅카메라 요도바시카메라같은 양판점은 편의주의의 꽃으로 외국 관광객이 쇄도하고 있다. 고품질 제조기술과 다양한 패션, 집적된 유통망, 대규모 국제물류망 등이 일본의 상업 편리주의를 뒷받침하고 있다.
불황의 30년을 버티게 해준 일본경제의 특징 중에 정성적인 측면을 꼽을 때도 편리주의가 앞자리에 있다. 생활이 편리하도록 창안하는 아이디어가 새로운 내수시장을 계속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아이디어를 기술로 구현하는 제조업의 장인기질을 첫손가락으로 꼽는 이도 있지만 장인기질로 경제를 만들어도 돌아가게 하는 것은 상업이다. 일본경제는 상인정신과 장인기질이 만나서 지탱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굴욕적이지 않은 한일친선, 평화협력의 새해 기대
올해 일본은 상반기의 저조했던 산업생산 때문에 0.4% 정도의 낮은 경제 성장률로 추정되지만 새해는 1% 정도 성장을 전망한다. 중국 변수로 기업의 수출 실적이 저조하나 기업의 디지털 투자가 크게 늘면서 내수가 주도하는 경기전망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해외수요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포기할 수 없는 일본의 경제정책이 미국 트럼프정부와 알력을 빚을 수도 있지만 일본에는 한곳에 올인하는 문화가 없다. 실리주의다.
한국은 130년 전 내란(을미사변)을 겪으며 양력이 들어왔지만 양력은 설 명절 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태양력의 해가 바뀔 뿐이다. 한국의 문화엔 양보해서 안될 것을 지키는 원칙주의가 있다. 환난을 이기는 힘이기도 하다. 한국은 올해 말 다시 내란을 겪으면서 환난 속에 새 시간표를 만들어 가고 있다. 2025년 을사년이 오고 있다. 이번 을사년엔 굴욕적이지 않은 한일친선, 대등한 평화협력의 시간을 기대해 본다.
일본경제연구센터 특임연구원전 테이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