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산책
2025 동남아 - 짙게 드리운 트럼프 2.0의 그림자
2024년 동남아 국가들과 이들의 협력체 아세안은 정치 경제 대외관계 등의 과목에서 상당히 괜찮은 성적표를 받았다. 물론 그 이전 30~40년 동안 동남아가 기록했던 빼어난 성적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적어도 계속되는 전쟁 정치갈등 경제위기에서 발버둥치는 다른 지역들에 비해 훨씬 좋은 성적을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24년 동남아 주요국들은 정치분야에서는 안정적인 변화를, 경제에서는 성장세 회복을, 지역협력과 대외관계에서는 현상 유지를 일궈냈다.
반면 2025년은 국내외적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2024년에 비교적 순조로운 권력승계가 이뤄졌던 다섯 나라의 지도자들은 올해 취임 2년차를 맞아 자신들의 국정수행능력이 시험대에 오를 것이고, 내전이나 민주화 등 체제 수준의 갈등을 겪고 있는 나라들은 그 갈등이 한층 심화되는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분야에서는 트럼프 2기 하에 예상되는 수입관세의 대폭 인상, 미중간 대립과 경쟁에 따른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증대, 국내적 요구 상승으로 인한 재정적 압박 탓으로 전반적으로 성장세는 위축되고 경제적 불안정성은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도 2기 트럼프행정부의 출범은 아세안의 위상과 아세안이 주도하는 지역통합의 미래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이익 우선, 중국견제, 양자적 접근에 초점을 맞춘 외교 기조는 ‘아세안중심성’을 약화시키고 아세안 내부의 갈등을 표면화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의미있는 정치발전 이룬 곳은 말레이시아
우선 올 한해 동남아 정치부터 전망해 보자. 최근 2~3년 동남아 대부분의 국가에서 리더십의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의미있는 정치발전을 이룩한 곳은 말레이시아뿐이다. 말레이시아는 2018년 2022년 두차례의 총선과 그 사이 3번의 연립내각 구성 등 정치적 혼란기를 극복하고 집권한 민주화의 상징 안와르 이브라힘의 ‘희망동맹’이 3년차를 맞이하면서 공고화된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태국은 2023년 총선에서 두곳의 비군부 야당이 압승을 거뒀으나 군부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2017년 헌법 및 선거법, 그리고 국왕과 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헌법재판소가 진정한 민주정부의 탄생을 가로막고 있다. 2024년 탁신 가문이 배출한 세번째 총리 패통안 친나왓 총리의 취임은 탁신파와 군부 간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고, 2023년 선거에서 총 득표율 38%, 총 의석수 비율 30%를 얻어 제1당으로 등극했던 전진당은 헌재 판결에 의해 해산되었다. 태국은 올해로 정확히 20년째 군부독재와 선거권위주의체제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민주화를 둘러싼 갈등은 언제든 폭력으로 비화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2024년 리더십 변화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두나라는 싱가포르와 베트남일 것이다. 싱가포르는 지난해 5월, 20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던 리시엔룽이 물러나고 51세의 전문적 경제관료출신인 로렌스 웡이 제4대 총리로 취임했다. 또한 공산당 서기장이 중심이 된 집단지도체제로 오랜 정치적 안정을 구가해 온 베트남은 작년 7월 응우옌 푸 쫑이 사망한 뒤 경찰(공안) 간부 출신 또 럼을 서기장에 옹립함으로써 또 한차례의 평화로운 정치적 승계를 완료했다.
2023년 아들 훈마넷에게 총리직을 넘겨준 캄보디아의 훈세인과 함께 동남아에서 가장 오랫동안 권좌에 있던 세 지도자들이 최근 2년 사이 권좌에서 물러난 것은 나름대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하지만 모두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절차에 의해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권력 이양 과정이 동남아 권위주의의 새로운 권력승계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싱가포르와 베트남은 야당과 반대세력의 힘이 약해 새 지도자에 대한 외부적 도전은 없겠지만 2013년 선거에서 45%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한 야당을 가졌던 캄보디아 정치는 여전히 폭발력을 갖고 있다.
정치쇠퇴 현상이 민주주의 좀먹어
동남아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불안정한 나라는 내전상태인 미얀마다. 선거참패에 불복한 군부가 2021년 2월 일으킨 군사쿠데타로 촉발된 내전은 올해로 5년차에 접어들지만 종식될 조짐도 해결할 방안도 보이지 않는다. 미얀마 민주화 투쟁의 기점이 되는 1988년 이래 국제사회 서방국가 아세안과 그 회원국들이 동원했던 어떤 평화적인 수단도 미얀마 군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내전에서 반군부 저항세력은 놀라운 능력으로 영토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고 하지만 양측의 의지나 동력만으로 미얀마 사태는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다.
동남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선거)민주주의 체제,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2025년 전망은 세계적 추세를 그대로 반영한다. 민주주의 신념과 인권의식이 결여되고 범죄적 경력을 가진 지도자, 정치 엘리트들에 의한 민주주의의 원칙과 제도의 파괴, ‘정치왕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카르텔화, 정치윤리와 권위주의적 통치에 무관심해진 국민, 소셜미디어와 AI를 통한 선동과 여론조작 등등 우리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정치쇠퇴 현상이 동남아의 대표적인 두 민주주의를 좀먹고 있다.
이 두 나라의 민주주의는 2025년에 들어 더욱 역행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트럼프 2.0 시대의 개막은 동남아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역행에 더욱 기름을 부을 것이다.
대다수 동남아 전문가들은 트럼프 2기의 대외정책이 2025년 동남아 경제와 아세안 발전에 가장 중요한 변수로 떠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각 나라 경제와 무역에서 대미 수출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중국과의 투자와 무역은 물론이고 인프라건설과 원조수혜에 이르기까지 밀접한 경제협력을 다각적으로 추진해 온 동남아국가들이 트럼프행정부의 관세인상과 대중견제로 타격을 받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2024년 5% 정도로 추정되는 높은 성장률로 강한 회복세를 보이던 동남아경제에 대해 아시아개발은행은 4.7% 성장률로 되레 위축될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과 경쟁관계에 놓인 동남의 신흥산업국가들은 미중 간 산업 탈동조화(디커플링)가 가속화되어 오히려 반사적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노골적인 아세안 경시 재연 가능성 높아
트럼프 2.0의 충격은 동남아 각국의 국내 정치나 경제 영역보다 아세안의 대내외 관계와 동남아 지역질서에 더 직접적으로 전달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트럼프는 동남아와 아세안에 큰 관심이 없다. 제1기 재임 동안 아세안정상회의에는 취임 첫해인 2017년 단 한차례 참석했을 뿐이고, 아세안정상회의 직후에 열리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는 단 한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2017년에는 아세안정상회의 참석 후 정작 미국이 회원국인 EAS에는 개막일까지 하루 더 기다릴 수 없다고 전용기를 타고 귀국해 버렸다. 2018년에는 부통령을 보냈다가 2019년에는 심지어 국가안보보좌관을 보냄으로써 아세안에 대한 경시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제1기 동안 트럼프가 관심을 보인 나라는 베트남 싱가포르 필리핀이 전부였다. 돈이 되는 회의, 돈이 되거나 아낄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트럼프의 아세안 경시는 동남아 지역질서에 심각한 함의를 가진다. 역사적으로 그리고 지금에도 선진 강대국들이 관심을 보이는 동남아에 정작 최강국 미국은 관심이 없다면 아세안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동남아는 중국의 독무대가 되고 아세안은 중국편에 설 것이라는 예측은 아세안을 우습게 보는 것이다. 제1기 트럼프시대 이래로 중국이 아세안 국가들에 인프라투자와 대규모 원조로 엄청난 공을 들였지만 동남아인들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 동남아는 되레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인도에 다가갔다. 트럼프 2.0은 한국에게도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하기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