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빈곤은 정치불안을 낳는다

2025-01-13 13:00:03 게재

경제적 빈곤은 정치적 불만자들을 낳고, 대체로 포퓰리스트들이 이들을 포섭한다. 1차세계대전 패전 직후 독일이 부담한 과도한 전쟁보상금과 통화증발 과정에서 발생한 초인플레이션은 독일 국민들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히틀러라는 문제적 인물은 이를 자양분으로 해 집권할 수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전개된 세계화의 패배자라고 볼 수 있는 미국·유럽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내셔럴리즘의 색채가 강한 포퓰리스트들을 그들의 정치적 대변자로 선택하고 있다.

경제의 파이가 커지지 않으면 공동체 내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물적기반이 약해진다. 한국 경제는 IMF외환위기 때까지의 고성장 시대와 이후 3~6%의 중속 성장의 시간을 지나 이제 1%대 성장이 노멀이 되는 저성장의 초입에 와 있는 듯하다

세대별로 고령층, 지역별로 제조업 기반 도시 경제적 불안 심화

세대별로 봤을 때 한국에서의 경제적 빈자는 고령자층이다. 베이비부머들이 대거 은퇴하면서 구매력을 가진 65세 이상 일부 시니어들이 파워컨슈머로 부각되는 흐름도 있지만 고령세대 전체적으로는 경제적 불안이 크다고 봐야 한다. 2022년 기준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38.1%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래도 국민연금은 수령하는 경우가 많지만 제도 도입이 늦었던 퇴직연금 등 사적연금의 축적이 빈약하고 보유자산이 부동산에 편중돼 현금흐름이 취약하다.

지역적으로는 제조업 기반 도시의 경제적 불안이 심화될 것이다. ‘중국의 약진’과 ‘자동화’가 가장 큰 도전이다.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분업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한국은 중국의 성장으로부터 가장 큰 수혜를 받은 국가였다. 노동집약적인 신발과 섬유산업은 중국과의 경쟁에 밀려 진작에 쇠락했지만 중간재를 중심으로 한 중국과의 교역은 한국경제에 압도적인 이익을 가져왔다.

1992년 수교 이후 2022년까지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 흑자는 7068억달러에 달했다. 같은 기간 동안 한국 전체 무역수지 흑자 규모는 7688억달러로 무역수지 흑자의 91%가 중국으로부터 나왔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 경제는 중국에 수출해서 번 돈으로 살아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중 교역의 손익이 마이너스로 바뀌고 있다. 2022년 5월부터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기조적 적자로 반전됐다. 중국 기업들의 경쟁력 향상이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 한국이 경쟁력을 가졌던 철강과 석유화학·태양광·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중국에 잠식당하고 있고, 반도체 D램 분야도 추격이 거세다.

자동화의 진전도 제조업 노동자에겐 이미 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조 분야에서 한국의 자동화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본은 강력한 노동운동에 대해 공격적인 자동화로 대응했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이다. 이제 한국의 자동차산업은 숙련노동자의 손끝이 아닌 엔지니어들이 설계한 공정에서 가치가 만들어진다. 현대차의 핵심 경쟁력은 현장 노동자가 아니라 공학지식으로 무장한 엔지니어로부터 나온다. 현대차의 연구개발센터가 제조공장이 있는 울산이 아니라 수도권인 화성시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현대차·기아는 판매량 기준 글로벌 3위까지 성장하면서 나름의 성취를 경험하고 있다. 자동화를 통해 만들어 낸 성과는 주주들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하지만 노동자에게 지급되는 임금을 통해 지역사회로 파급되는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경제적 불안이 포퓰리스트 득세 등 유동적인 정치지형 만들어

한국의 고령화 속도는 너무 빠르고 15년 전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축에 속했던 핵심 제조업 도시들은 낙차 큰 쇠락에 직면해 있다. 경제적 불안이 곧 포퓰리스트의 득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경제적 불안은 매우 유동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곤 했고 미국의 포퓰리스트와 유럽의 극우정당들이 이를 기회로 삼아 약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