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치, 한국 국가신용등급 유지했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

2025-02-07 13:00:02 게재

피치, 계엄 후 국제신용평가사 중 첫 평가서 기존 AA―등급 유지

성장률 전망은 2.0→1.7%로 낮추고 “장기 정국혼란시 위험” 경고

미국과 프랑스도 소요사태 18~30개월 뒤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12.3 계엄 이후 첫 국제신용평가사 평가에서 우리나라는 이전과 같은 국가신용등급(AA―)을 유지했다. 다만 내란과 트럼프 리스크 영향으로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다시 0.3%p 하향 조정됐다. 정국혼란이 장기화하면 국가신용등급 위협요인이 될 것이란 경고도 잊지 않았다.

내란사태 와중에도 국가신용등급을 유지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지적이다. 위헌적 계엄을 발령한 윤석열 대통령의 직무는 정지됐지만 내란정국은 아직 진행형이다. 일부 국민들은 계엄발령을 정당화하고 탄핵절차 중단까지 공공연히 요구, 내란정국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어서다. 실제 2023년 미국과 프랑스는 대형소요사태 발생 1~3년이 지나 국가신용등급 하락사태를 맞았다.

서부지방법원 폭동 현장 지난달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구속되자 일부 지지자들이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했다. 사진은 이날 서부지법 후문 인근에서 경찰과 맞서고 있는 윤 대통령 지지자들 모습 연합뉴스 신현우 기자

◆신용등급 유지는 했지만 - 7일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A―’로 유지했다. 피치는 앞서 2012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올린 뒤 이를 유지해 왔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도 신용등급 하락사태는 일단 피한 것이다. 한국의 신용등급 전망 역시 ‘안정적’이라고 봤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한국 경제와 국가 시스템에 실질적인 영향은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하지만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1.7%로 낮춰 잡았다. 피치는 지난해 12월9일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2025년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2.3%에서 2.0%으로 낮춘 바 있다. 한 달도 안 돼 0.3%p 추가로 내린 것이다.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경제심리 위축과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보편관세 부과에 따른 수출 둔화 우려가 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의 이유로 꼽혔다.

정국 혼란이 계속될 경우 신용등급에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도 나왔다. 피치는 보고서에서 “정치적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정책 결정의 효율성과 경제 성과, 재정건전성 등이 악화될 수도 있다”며 “더 심각한 정치적 변동성에 따른 위험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치는 정부 부채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경우 신용등급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함께 제기했다.

◆“해외투자자 불안 해소 기대” = 피치는 한국이 2026년부터는 소비와 설비·건설 투자의 개선에 힘입어 성장률이 2.1%로 조금 회복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가재정은 지속적인 재정수입 회복과 지출 통제 노력에 따라 작년 GDP 대비 1.7%에서 올해 1%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가계부채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금융시장 관련 리스크는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또 부동산 PF 관련 리스크 역시 정부의 선제적인 정책대응과 구조조정 노력에 힘입어 관리가능한 수준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피치는 올해에도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높은 수준(GDP 대비 4.5%)을 유지할 것으로 봤다.

지속적인 경상수지 흑자와 GDP 대비 23%(피치 자체추정)에 달하는 순대외자산이 견고한 대외건전성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북 리스크에 대해서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실험과 대남 적대 발언 등이 지속되면서 북한과의 긴장이 고조되고 남북 관계가 복잡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최근 북러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북한에 대한 외교적 접근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이 확대된 가운데 이번 결과가 발표돼 한국의 대외신인도에 대한 해외투자자들의 불안도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정치불안 길어지면 신인도 흔들 = 그러나 앞으로도 국가신용등급이 유지될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이르다는 지적이다. 내란사태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서다. 오히려 윤 대통령 탄핵 인용 반대 목소리가 커지는 추세란 점도 주목된다. 정국불안이 예상보다 길고 복잡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피치의 지적대로 정치불안이 길어지거나 친위쿠데타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정국이 전개되면 신용도에도 나쁜 영향을 준다.

실제 헌법재판소가 윤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할 경우, 정국불안과 함께 국가신용등급에 부정 영향을 줄 것이란 지적이 많다. 한국의 정치시스템이 개발도상국 수준으로 퇴보하고, 경제 불확실성이 확대될 것이라고 볼 수 있어서다.

쿠데타나 정쟁에 따른 대규모 소요사태 뒤에는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됐다는 세계사적 경험도 불안요인이다.

신용평가회사들이 최근 국가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한 나라는 아프리카 가봉과 미국, 프랑스다.

가장 최근 사례는 가봉이다. 피치는 지난해 7월 아프리카 가봉의 신용등급을 B+에서 CCC+로 강등했다. 쿠데타 이후 정치적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한 게 핵심이유다. 피치는 “2023년 8월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 가봉은 과도정부를 구성해 대통령 선거를 추진했지만, 결국 선거 계획을 2025년 8월로 미루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신용등급 하락 배경을 설명했다. 쿠데타 발생 딱 1년 만에 국가신용등급이 하락한 것이다.

◆미국·프랑스 전례 주목 = 2023년에는 선진국인 미국과 프랑스가 강등됐다. 공교롭게도 두 나라 모두 쿠데타는 아니지만, 대규모 소요사태 발생 2~3년 뒤 강등됐다. 피치는 2023년 미국 신용등급을 강등했고 무디스는 프랑스의 신용등급을 깎았다. 또 신용평가사들은 2022~2023년 영국의 신용등급은 유지하되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이때도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극단적 정치불안이 소요사태로 이어지고, 신평사들이 이를 기점으로 국가신용등급을 강등한 것이다.

피치는 2023년 8월1일 미국의 신용등급을 AA+로 한 단계 내렸다. 보고서에서는 “미국의 재정 악화와 국가채무 부담이 향후 3년간 증가할 것으로 보이고, 거버넌스(governance)가 나빠졌다”고 썼다. 이어 리처드 프랜시스 등급 책정 공동 책임자는 인터뷰를 통해 “2021년 1월6일 의사당 점거라는 소요 사태를 등급 강등에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2016년 쿠데타로 국가신용등급이 몇년에 걸쳐 줄하락한 터키도 마찬가지다. 무디스는 당시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이로 인한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가해 국가의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며 신용등급을 하향 조정할 계획을 밝혔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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