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인플레 기대감 30년래 최고…우려 커져
소비자들, 향후 5~10년 물가 3.5% 예상 … 최근 경제선진국 전반 물가 들썩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잇따른 관세가 물가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로 미국 소비자들의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3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다.

미국 미시간대학교가 최근 발표한 2월 소비자심리지수는 64.7로 전월 71.7 대비 10% 가까이 하락했다. 또 소비자들은 향후 5~10년 동안 물가가 연 평균 3.5%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블룸버그통신은 22일 “이는 199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고 전했다. 향후 12개월 동안의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4.3%로 2023년 11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또 설문조사에 참여한 소비자 절반 이상은 내년 실업률이 2020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고가품 구매 의향이 하락하는 등 소비자심리지수를 구성하는 5가지 요소가 모두 악화됐다.

블룸버그는 “지난해 11월 트럼프 당선 이후 인플레이션이 완화될 것이라는 전반적인 기대감에 힘입어 소비자심리지수가 급등했지만 트럼프발 무역전쟁으로 미국 소비자들이 물가상승을 예상하면서 심리지수를 끌어내렸다”고 분석했다.
관세로 인한 물가 불확실성은 기준금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연방준비제도(연준) 제롬 파월 의장을 비롯한 관계자들은 추가 금리인하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점을 연이어 시사하고 있다.
BMO캐피털마케츠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프리실라 티아가모르디는 “관세가 물가상승 압력을 높일 가능성을 고려할 때 연준의 주요 초점은 인플레이션을 목표치로 되돌리는 것”이라며 “연준은 인플레이션 기대감이 고삐 풀리는 상황을 가장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장기 인플레이션 전망의 지속적인 증가는 연준에 특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연준은 2022년 중반에도 미시간대 설문조사에 주목한 바 있다. 2022년 6월 예상보다 높은 소비자물가와 더불어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급등하자 연준은 기준금리를 50bp(0.50%)가 아닌 75bp 인상해야 했다.
미국 금융회사 ‘너드월렛’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엘리자베스 렌터는 “높은 인플레이션 기대치는 자기충족적일 수 있다. 즉 소비자와 기업이 기대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며 “연준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상적 위험요소에 직접 대응할 계획은 없다고 말하지만 소비자들이 물가상승 위험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에 맞춰 어떻게 행동하는지에 대해 연준은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최신호도 인플레이션 기대감의 자기충족적 속성에 주목했다. 이 매체는 “노동자는 미래에 더 높은 비용이 들 것으로 예상하면 현재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한다. 쇼핑객들은 가격상승을 예상하며 서둘러 구매를 하고, 이는 수요를 늘려 가격을 상승시킨다”고 전했다.
최근 데이터에 따르면 이러한 역학관계가 나타나고 있다. 1월 미국 임금은 연율로 5.9% 상승했다. 미시간대 설문조사에 참여한 응답자의 20% 이상이 ‘곧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있으므로 지금이 전자제품이나 가구와 같은 고가 품목을 구매하기에 좋은 시기’라고 답했다. 이는 30년 만에 가장 높은 비율이다.
인플레 기대감의 자기충족성
21일 발표된 데이터에 따르면 2월 미국기업 활동이 둔화됐다. 서비스 부문이 이를 주도했다. 또 높은 모기지금리와 물가상승으로 1월 주택매매가 지난해 9월 이후 처음으로 감소했다. 미시간대 조사에 따르면 2월 미국 소비자들의 재정형편 지수는 전달 75.1에서 65.7로 하락했다. 지난 1월 식품·에너지를 제외한 미국 소비자물가지수가 연율로 5.5% 상승하자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바이든정부 초기 이후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 인플레이션은 40년 만에 최고치로 상승한 바 있다.
최근 연준의 여러 관계자들은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안정적으로 유지된다면 관세로 인한 단기적인 물가상승에 대응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물가상승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는 소비자들의 징후가 나타나면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인상해야 할 수도 있다.
세인트루이스연방준비은행의 알베르토 무살렘 총재는 지난 20일(현지시각)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이 짧고 제한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 물가상승을 무시하거나 관망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면서도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높게 지속되거나 장기적인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상승한다면 다른 통화정책 대응이 적절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댈러스연방준비은행 로리 로건 총재도 최근 “인플레이션 기대치가 통제불능 상태가 되면 물가안정은 엄청난 경제적 대가를 치러야만 가능하다”고 경고했다.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빌 클린턴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역임한 조지프 스티글리츠도 “연준이 트럼프 정책의 인플레이션 효과에 걱정하고 있다”며 “이로 인해 금리를 인상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지난주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트럼프 관세로 물가가 상승할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며 “물가가 얼마나 오를지는 환율 상승의 정도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겠지만 모든 경제학자들은 환율이 관세 효과를 전부 상쇄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트럼프의 관세 위협이 미국을 투자하기 무서운 곳으로 만들었다.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에 경제침체)을 유발할 수 있다”며 “트럼프가 제기하는 불확실성으로 세계경제가 너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불확실성, 세계경제 타격”
미국뿐 아니라 경제선진국들 전반에서 물가가 들썩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2022년 11%로 정점을 찍은 후, 경제선진국 인플레이션은 최근까지 꾸준히 하락했다. 하지만 각국 중앙은행들이 금리를 인하함에 따라 경제선진국 명목 인플레이션이 다시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9월 2.1%에서 12월 2.5%로 상승했다.
이달 19일(현지시각) 영국이 발표한 1월 인플레이션은 전년 동월 대비 3%였다. 최근 최저치인 1.7%에서 상승했다. 폴란드의 1월 인플레이션은 5.3%로 전월 4.7%에서 상승했다. 독일 인플레이션은 2.3%로 전월 대비 하락했지만 지난해 중반 1.6%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경제선진국들이 1970년대의 실수를 반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플레이션을 잡았다고 방심했다가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1974년 12%였던 미국 인플레이션은 1976년 5%로 떨어졌다가 1980년 다시 15%로 상승했다. 연준은 1979년 유가충격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을 만큼 빠르게 정책을 조정하지 못했다. 1980년대 초 심각한 경기침체를 겪은 후에야 마침내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었다.
경제선진국 노동시장도 여전히 타이트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실업률은 거의 3년 동안 5% 미만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주요 경제선진국들의 경우 기업들이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명목임금이 전년 대비 4% 이상 상승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하지만 생산성 증가는 미약하다. 고용주가 임금 상승분을 더 많은 생산량에 분배할 수 없다면 소비자에게 가격상승의 형태로 전가할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이같은 상황은 특히 서비스부문에서 두드러진다. 주요 경제선진국 서비스 가격은 전년 대비 4% 상승했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의 약 2배에 달하는 수치다. 1월 서비스물가를 공개한 18개국 가운데 14개국이 서비스 인플레이션이 상승했다고 보고했다. 포르투갈에서는 1%p, 에스토니아에서는 3.7%p 올랐다.
한편 트럼프발 관세에 대한 보복관세 대응으로 각국의 인플레이션 기대감도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유럽연합(EU)의 인플레이션은 3% 미만이었다. 하지만 유럽 시민들은 향후 12개월 동안 물가가 10% 상승할 것으로 예상한다. 2010년대 예상치보다 2배 높은 수치다. 캐나다 인플레이션은 지난해 8월 이후 2% 이하를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캐나다인들은 향후 1년 인플레이션을 3%로 예상하고 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