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미국과 중국에 대처하는 싱가포르의 외교

2025-02-28 13:00:03 게재

트럼프 2기가 시작되면서 지구촌 내 대부분의 국가는 미국 신행정부가 취할 대외정책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또 다른 핵심세력인 중국에 대한 대처 역시 큰 관심사다. 새로운 질서가 형성될 수 있는 유동적인 상황에서 우리의 좌표 정립은 어려운 도전일 수밖에 없다. 이런 때에 우리와 유사하게 미중 틈바구니에서 국익을 지키고자 분투해온 싱가포르의 대외정책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싱가포르는 대미외교에서 실용을 추구하되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 1990년 필리핀이 클라크 공군기지와 수빅 해군기지에서 미군의 철수를 요구했을 때 싱가포르는 주변국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측에 자국 내 기지를 이용토록 제안해 오늘날까지 긴밀한 군사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반면 미국의 정책이 자국의 가치나 입장에 반할 때는 분명한 견해를 밝혔다. 1983년 미국의 그레나다 침공 시 이를 국제법 위반이라고 규탄한 유엔 결의에 적극 찬성했고 1988년 싱가포르 국내 정치에 개입한 혐의로 미국대사관 1등 서기관을 추방했다.

1994년 공공기물을 의도적으로 파손한 미국 소년에 대해 법원이 벌금과 태형 6대를 선고하자 미 조야는 야만적인 조치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클린턴 대통령이 태형 집행 중지를 요청하는 서한까지 발송했으나 싱가포르는 미 대통령의 요청을 고려했다며 태형을 4대로 줄여 집행했다. 1999년에는 싱가포르 개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최종 의장성명에 미국의 유고 중국대사관 폭격에 유감을 표명하는 문구를 넣어 미측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태도는 소국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국익이 있으며 이를 적절히 타협하면 단기적으로 편리할 수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비용을 치른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용 추구하되 원칙 지키는 강소국 외교

싱가포르에 대한 중국의 압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국민 중 대다수가 중국계로 구성됐기에 중국은 싱가포르가 ‘중국계 국가(Chinese country)’로 자리매김하길 원한다. 따라서 싱가포르가 중국의 이익에 반하는 행태를 보이면 더욱 섭섭해하며 강한 대응을 해왔다.

2004년 리센룽 부총리가 총리 취임 직전 대만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나 2016년 중국과 필리핀 남중국해 분쟁에서 필리핀에 유리한 판정을 한 국제사법재판소 결정을 싱가포르가 지지했을 때 중국은 제재조치까지 하며 격렬히 반응했다.

이는 2016년 대만에서 군사훈련을 마친 싱가포르의 장갑차를 운송하던 상선이 홍콩에 잠시 기항하자 중국이 이를 장기간 억류하면서 절정으로 치달았다. 싱가포르는 중국의 압박을 직·간접적으로 공개하면서도 제재 해제는 간청하지 않고 주권면제가 인정되는 타국 국유재산의 압류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라며 국제법상의 절차를 취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대응의 결과 중국은 관계를 다시 정상화하고 장갑차를 반환하는 해법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2017년에는 리콴유 공공정책대학원 소속의 중국 출신 학자가 정부 최고위층에 접근해 친중정책을 유도하려 하자 곧바로 추방했다.

싱가포르가 중국 압박에 강하게 대응하는 것은 1950~1960년대 중국 공산당이 통일전선 전략으로 끊임없이 싱가포르정부를 전복코자 했던 사실에 대한 기억과 ‘능력주의에 기반한 다인종 사회’라는 국가 정체성이 ‘중국계 국가’로 변질될 수 있다는 실존적 위협 인식 때문이다.

싱가포르 모델과 초당적 협력의 필요성

한편 싱가포르는 중국 및 미국과의 갈등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양국과의 협력은 그 어느 나라보다 공고히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싱가포르의 최대 수출국이자 수입국이며 연중 다양한 고위급 교류를 진행하고 있고 코로나 기간에도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패스트트랙을 맺어 인적교류를 강화한 바 있다.

미국 역시 오랫동안 전 아시아 국가 중 싱가포르에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또 동맹국이 아님에도 동맹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주요 지도자의 역내 방문 시 동남아 여타 동맹국은 건너뛰더라도 싱가포르는 대부분 포함시킨다.

트럼프행정부의 더욱 강화된 자국 중심주의와 중국의 급속한 부상에 따른 도전으로 대외적 환경은 한치 앞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탄핵사태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는 형국이다. 이럴 때일수록 강소국 싱가포르가 미국과 중국에 취해온 실용과 원칙에 기반한 정책도 참고하면서 합리적인 우리 정책을 만들어가길 희망한다.

안영집 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 전 주 싱가포르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