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거품청산 뒤 장기성장 노리지만…
각종 경제정책 ‘청산주의 이론’ 닮아
WSJ “투자자신뢰 관건 … 어려울듯”
트럼프 1기행정부 시절 미국증시는 올랐다. 투매로 이어질 각종 정책을 폐기할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이제 2기행정부는 그와는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관세부과와 예산삭감이 단기간 시장침체를 부른다 해도, 장기적인 경제성장이라는 과실을 맺을 것이라는 믿음에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2일(현지시각) “트럼프정부 관점은 ‘청산주의(liquidationist)’ 접근법과 닮았다”며 “역사적으로 대공황 이후 허버트 후버 대통령 시절의 정책으로, 의도적인 경제침체를 불러 거품을 제거하려는 목표를 내세웠다. 문제는 투자자들에게 이를 납득시킬 증거가 많지 않다는 점”이라고 전했다.
S&P500지수는 지난 한달간 7.5% 하락했다. 기술주 중심 나스닥은 10.2% 하락했다. 두 지수 모두 이번주 들어서도 하락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경제침체를 배제할 수 없다고 인정하면서다. 자동차와 소매업, 호텔숙박업 등 경제심리에 민감한 S&P500 소비재량 부문지수는 한달 만에 13.1% 하락했다.
반면 유럽증시, 특히 독일증시는 상승세다. 그간의 긴축정책을 버리고 인프라와 국방분야에 대한 지출을 크게 늘리겠다는 기조 전환 덕분이다. 트럼프 경제팀은 그와 반대로 연방기관 인력과 지출을 줄이는 데 전념한다. 정부 예산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다. 지난해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어섰다. 재무장관 스캇 베센트는 “미국경제가 재정부양 중독에서 벗어나는 ‘디톡스(detox)’ 기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트럼프정부는 또 캐나다와 멕시코 중국산 수입품에 대규모 관세를 부과했다. 추가관세 카드도 꺼내들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8년 전 1기정부의 관세정책과는 명확히 구분된다. 당시의 관세는 시간차를 두고 점진적으로 부과됐다. 게다가 경제성장을 북돋울 대규모 감세정책을 먼저 시행한 뒤 관세를 부과했다. 당시 트럼프는 또한 중국과 무역합의를 이루려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무역갈등이 시장침체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최근까지만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시장침체를 막아줄 것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투자자들은 이를 ‘트럼프 풋(Trump put)’으로 불렀다. 투자자의 손실 위험을 막아줄 수 있는 옵션계약을 따다 붙였다. 하지만 베센트 장관은 최근 CNBC 인터뷰에서 주식투자자들이 트럼프 풋 대신 ‘트럼프 콜(Trump call)’에 대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국 경제시스템에서 거품을 제거해야 증시가 상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이론은 월가 일각의 지지를 받는다. 모간스탠리는 지난 10일(현지시각) “증시의 단기적 고통은 올해 말이나 내년 장기적 상승으로 상쇄될 수 있다”며 “공공지출에서 민간지출로 전환돼야 시장이 소수의 거대 기술기업들에 의존하지 않고 광범위하게 상승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상 최고치 수준(코로나19 기간 제외)인 미국기업들의 이익은 사실 정부지출과 많은 관계가 있다. 미국경제분석국에 따르면 2022년에서 지난해 3분기 사이 창출된 기업이익의 약 60%가 정부의 공공지출·투자 덕분이었다.
물론 정부에 대한 의존도는 2차세계대전 이후 평균치보다는 덜하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세금감면과 탈규제, 국방지출 증대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그 결과 당시 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익 모두는 사실 대규모 재정적자에서 비롯됐다.
물론 시기에 따라 다른 동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엔 기업들이 컴퓨터 장비 등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자체적으로 이익을 냈다. 2000년대 들어 가계 소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 가계들은 사실 번 것보다 많이 지출했다. 매우 저렴한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신용대출 등을 손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다. 하지만 이런 경제는 건전한 균형과는 거리가 멀었다. 닷컴버블과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럼프정부가 생산거점을 미국내로 들이려는 노력을 통해 미국의 무역적자를 줄이면서 동시에 지속가능한 투자 붐을 조성할 수 있을까. WSJ는 “가능할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변덕스러운 관세정책은 그렇게 하기에는 좋은 도구가 아니다. 불확실성을 높여 투자할 의욕을 떨어뜨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대공황 이후 후버정부의 극단적인 청산주의 정책은 목표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다. 유로화 위기 이후 그리스와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이 시행한 긴축정책 역시 실패했다. 최근 아르헨티나 밀레이정부가 시도했던 것처럼 활황세의 경제를 갑작스레 멈춰세우는 효과는 기껏해야 인플레 상승 소용돌이에서 빼내는 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WSJ는 “오히려 현재 인플레이션에 불을 붙일 위험이 있는 건 트럼프 관세다. 기준금리를 낮춰 경제적 충격들을 방어하려는 연방준비제도의 임무를 더 어렵게 한다. 투자자들은 확실히 청산주의 정책 전환에 동조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