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아프리카 식민지배의 상처와 과거사 문제
북아프리카 알제리 지중해안에 위치한 로마유적지 티파자 언덕 위에는 알제리 태생의 프랑스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알베르 카뮈에게 봉헌된 시비(詩碑)가 서 있다. 티파자의 풍경과 사랑을 예찬한 ‘티파자에서의 결혼’에 나오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말미의 카뮈 이름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독립을 반대했던 카뮈에 대한 알제리인들의 분풀이다.
카뮈는 프랑스와 알제리가 오랜 세월 함께한 공동체로 알제리는 프랑스와 알제리 두 민족 공동의 조국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사에서 비롯된 그의 주장은 정치세력에 악용되어 많은 비난을 받았고 알제리인들에게는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 제국주의 식민통치를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과거사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19세기부터 아프리카 북부 및 중서부를 중심으로 전체 아프리카 대륙의 40%를 차지했던 프랑스는 민족자결 인식 확산으로 이들이 차례로 독립하고 식민시대가 완전히 종결된 후에도 친프랑스 엘리트 세력의 집권을 지원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프랑스와 독점 교역을 강제하는 등 구식민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지속해나갔다.
프랑스는 1, 2차세계대전에 식민지 국민을 대거 프랑스군에게 편입해 참전시켰고 수많은 아프리카인이 프랑스를 위해 싸우다 희생되었다. 아프리카 출신 군인들은 심한 차별 대우를 받았고 이에 반발해 집단봉기를 일으킨 세네갈 군인 1300명이 한꺼번에 학살당하기도 했다.
잔혹한 식민 통치가 남긴 깊은 상처
그중 최장기간 식민지배(1830~1962)를 받고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유혈 독립전쟁(1954~1962)을 치른 나라가 알제리다. 다른 식민지와 달리 본토의 일부로 간주해 하나의 도(都)로 편입된 알제리에 많은 프랑스인이 정착했고 주거 교통 교육 항만 등 인프라 건설에도 공을 들였다.
몇세대에 걸친 식민통치 내내 알제리인에 대한 극심한 차별은 물론 저항세력에 대한 온갖 인권유린과 학살 행위가 자행되었다. 1945년에는 시위대에 본보기를 보인다고 공군기를 동원해 한 지역을 융단폭격해 전 주민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생존자는 단 세명뿐이었고 그 중 한명은 훗날 작가가 되어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고발했다.
8년간의 독립전쟁 동안 200만명의 알제리인들이 희생되었으며, 1961년에는 파리에서 평화 시위대를 학살하는 사건마저 벌어졌다. 프랑스는 그 와중에 알제리 사하라사막에서 핵실험을 감행해 세계 4번째 핵보유국이 되었다. 하지만 그 폐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대에 편입된 알제리인을 ‘아르키(Harki)’라고 부른다. 이들은 심지어 독립전쟁에서도 프랑스군에 속해 싸웠다. 그 숫자는 무려 25만명에 달한다. 1962년 에비앙협정으로 독립전쟁이 끝나자 프랑스정부는 자신들을 위해 싸웠던 아르키를 외면한다. 가족 포함 약 5000명의 아르키들만 프랑스로 데려왔을 뿐 나머지 아르키들은 수용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해 버린 것이다.
결국 알제리에 남은 아르키들은 무자비한 보복의 대상이 되어 참혹한 죽음을 맞는다. 프랑스는 2021년 마크롱 대통령이 공식사죄를 표명할 때까지 아르키 문제를 외면하고 방치했다. 알제리를 찾는 역대 프랑스 대통령마다 식민통치와 아르키들의 희생을 언급하며 책임을 지겠다고 했지만 공식사과까지는 60여년이 걸렸다. 최근에서야 비로소 아르키위원회가 창설되어 과거사 공동조사와 보상논의에 들어갔다.
올해 초 프랑스는 SNS에서 테러를 선동하는 알제리 출신 인플루언서를 알제리로 강제 추방했다. 알제리는 그대로 맞추방해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사건이 심각한 외교문제로 번지자 프랑스는 연일 논쟁에 휩싸였다.
그동안 알제리 비위를 맞추려 우유부단했던 탓에 프랑스가 모욕당했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알제리와의 완전한 결별이 필요한 시점이라며 비자 발급과 무상원조 중단을 주장하는 강경여론이 지배적이다.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라는 말은 꺼내자마자 배타적 주장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이율배반적인 태도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는 철저한 과거사 규명과 전범자 처벌에 전력을 다했다. 그런 이후에 독일과 궁극적으로 화해했고 양국은 공동역사교과서 편찬까지 이루어냈다. 과거사 문제를 매듭짓지 않고서는 진정한 미래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프랑스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1948년 유엔이 인권선언을 채택할 당시 전 세계 3/4이 여전히 식민 지배 상태에 있었다는 위선적 현실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