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칼럼
‘트럼프의 길’이 미국의 길인가
2차대전 이후 80년간 미국이 중심이 되어 쌓아올린 국제규범과 세계질서가 지금 심각한 붕괴 위기에 놓여 있다.
지난해 11월 재선에 성공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명분으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편을 들었고, 민주주의 가치를 토대로 형성된 동맹관계를 ‘미국경제를 빨아먹는 거머리’라 비유하며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파리협정 탈퇴 선언, 그린란드와 파나마 편입 제안 등 19세기식 팽창주의 정책도 다시 꺼내들었다.
그에게 표를 몰아준 미국 유권자들이 이 같은 대외정책을 속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기존의 국제질서에 적응하며 살아온 미국 외 국가들은 혼란스럽고 불안하다. 특히 자유민주주의의 모델 국가로서 미국을 신뢰해온 한국 같은 나라들은 안보와 경제에 대한 불안은 물론이고, 가치관의 혼돈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고 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를 자임하면서도 푸틴에게는 유화적이고 젤렌스키에게는 모욕적으로 대했다.
냉전 이후 러시아에 움튼 민주주의의 싹을 짓밟고 25년 넘게 독재 권력을 휘둘러온 푸틴이 전쟁의 책임자인데 트럼프는 오히려 젤렌스키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회담 중 ‘독재자’라 비난했다. 반면 푸틴에겐 “나는 중립적 중재자”라며 독재자라는 호칭을 끝내 거부했다.
2차대전 후 80년 유지 국제규범 붕괴위기
전통적인 미국 외교라면 러시아와 종전 협상은 하되 동맹국 국가원수를 공개적으로 모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머릿속엔 동맹과 적의 구분이 모호하다. 강자와의 거래를 위해 약자를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의 본능적 협상방식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만일 유엔총회에서 우크라이나가 상정한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미국이 반대표를 던졌다면 이는 미국의 외교원칙에 대한 정면 위반일 것이다. 현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트럼프가 세계를 향해 던지는 메시지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제관계를 동맹과 적으로 구분하기보다 거래관계로 전환하려는 그의 본성은 관세정책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그는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무시하며 평균 20% 이상의 고율 관세를 무기로 휘두른다. 겉으론 ‘산업정책’이라 주장하지만 많은 미국 정치평론가들은 트럼프가 원하는 건 일종의 전제군주적 권력행사라고 분석한다.
트럼프는 동맹과 관세를 한데 묶는 독특한 프레임을 만들어낸다. 그는 나토(NATO) 동맹국들을 ‘미국경제를 빨아먹는 기생충’에 비유하고, 미국의 핵우산을 ‘요금이 부과되는 버스’로 설정해 관세를 받겠다는 논리를 편다. 이 프레임에 따르면, 한국도 ‘살이 오른 공짜 탑승자’쯤으로 분류돼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의 대외정책에서 또 하나 주목할 지점은 주변국에 대한 팽창주의적 접근이다. 그는 멕시코만(Gulf of Mexico)의 명칭을 ‘아메리카만’(Gulf of America)으로 개명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이를 따르지 않은 AP통신사에는 백악관 취재 제한이라는 보복 조치를 취했다.
400년 이상 국제적으로 통용된 명칭까지 바꾸려는 이 시도는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떠올리게 한다. 언어를 조작해 인식을 바꾸고 지리와 역사의 의미까지 ‘미국 중심’으로 프레임화하려는 것이다.
트럼프는 캐나다의 미국 51번째 주 편입을 제안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처음엔 정치적 농담처럼 들렸지만, 그는 국경선을 “인위적 선”이라 부르며 과거 식민지 시절 미국과 캐나다가 하나였다는 뉘앙스를 흘렸다. “두 나라는 본래 하나였고, 경제와 안보를 위해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발언은 북미통합론자들에게 반가운 메시지였지만, 캐나다에서는 주권침해로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접근은 그린란드 문제에서도 이어진다. 그린란드는 수백년간 덴마크왕국의 지배를 받아온 자치령이다. 기후변화로 북극해의 전략적 가치가 높아진 가운데 트럼프는 그린란드의 분리독립을 지지하는 정당 지도자를 취임식에 초청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1월 1일엔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부친의 전용기를 타고 덴마크 자치령 그린란드를 방문했다. 미국의 영향력 아래 이 섬을 끌어들이려는 포석으로 읽힌다.
'트럼프의 길' 세계의 미래될 수 있을까
‘선출된 황제’. 미국 대통령을 이렇게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군사력 경제력 그리고 조셉 나이가 말한 소프트파워까지 갖춘 막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그 자리에 트럼프가 앉아 있다. 그는 국제질서에 대한 철학도, 일관된 전략도 없이 남아 있는 미국의 힘을 푸틴이나 시진핑 같은 제왕적 권력자들과의 거래에 써버리고 말 것만 같다.
그의 길이 과연 미국의 미래이자 세계의 미래가 될 수 있을까. 미국은 이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답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