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산책

아트로핀과 코카인은 사촌이다

2025-03-25 13:00:14 게재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등장하는 아트로포스(Atropos)는 운명의 실을 잘라 생명을 거둬들이는 여신이다. 압도적인 힘을 지닌 아트로포스에게는 언니가 둘 있다. 첫째인 클로토는 운명의 실을 뽑아내고 둘째인 라케시스는 그 실을 감거나 짜는 소임을 맡는다. 사람들은 이들 여신을 동물에 빗대기도 했다. 클로토는 거미, 레케시스는 뱀이지만 아트로포스는 일시적인 삶을 뜻하는 나방이나 애벌레로 변신한다. 삶은 유한하고 유전자 대물림은 세대를 이어간다는 엄정한 생물학적 필연이 도저(到底)하다.

신화에 머무르는 대신 아트로포스는 인간 세상에 내려와 아트로핀이 되었다. 가지과 식물의 뿌리에서 발견되는 독성 물질인 아트로핀은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는 꽤 익숙한 이름이다. 화생방 훈련에서 독가스에 노출되면 눈물 콧물 범벅이 되는데 아트로핀이 그 해독제로 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량의 아트로핀을 섭취하면 호흡근이 마비되면서 죽기도 한다. 이런 연유로 아트로포스가 신화 속 주인공이 되었겠지만 아무튼 적당한 양이라면 아트로핀을 치료 목적으로 쓸 수 있다. 이를테면 망막을 검사할 때 눈동자를 확대하거나 수술 전에 침과 기도 분비물을 줄이고자 흔히 아트로핀이 사용된다. 중세의 여성들이 파티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자 눈에 벨라돈나(Belladonna) 추출액을 넣었을 때도 이 화합물이 슬그머니 등장한다.

사촌 화합물이지만 유전자 기원 달라

유럽에 아트로핀이 있었다면 남미에는 코카인이 있다. 아트로핀과 코카인은 생김새가 워낙 비슷해 종이에 화학구조를 그리면 차이를 거의 못 느낄 정도다. 게다가 이 두 화합물은 계통적으로 트로판(tropane) 계열의 가까운 사촌 화합물이다. 하지만 3차원 공간에서 보면 구조의 한쪽 부분이 올라가거나 내려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화합물은 모두 질소를 가지는 데다 염기성이어서 알칼로이드(alkaloid) 그룹으로 분류된다.

아트로핀처럼 코카인의 역사도 요란하다. 일명 ‘코 사탕’으로 불리는 코카인은 국소마취제지만 각성효과가 매우 크고 환각을 일으키는 중독성 약물이다. 1994년 개봉한 뤽 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에서 악역 주인공이 클레식 음악을 틀어놓고 정신없이 코카인을 들이마시는 모습을 실감 나게 재현한 바 있다. ‘욕망의 코카콜라’에서 김덕호는 세계 시장을 향해 자본의 욕망이 펼쳐지는 모습을 코카콜라라는 상징물을 빌어 분석했다.

초창기 코카콜라는 코카 잎의 성분인 코카인과 콜라 열매인 카페인을 섞어 자양강장제로 판매를 시작했다. 그러나 카페인이 문제가 되자 이를 뺀 코카콜라가 본격적으로 현대인의 혀와 단맛 수용체를 사정없이 공략하게 된다.

이제 관점을 약간 틀어서 코카인과 아트로핀의 미처 드러나지 않은 차이점을 살펴보자. 아트로핀은 주로 가지과 식물인 흰독말풀이나 맨드레이크의 뿌리에서 합성된다. 그와 달리 코카인은 코카나무과 식물의 잎에서 만들어진다. 만들어지는 곳이 현저히 다른 탓에 과학자들은 아트로핀과 코카인이 서로 다른 생합성 경로를 거쳐서 만들어질 것으로 추정했다.

사실 트로판 알칼로이드는 배추와 무가 속하는 십자화과(Brassicaceae)를 포함해 7개의 동떨어진 식물집단에서 생성된다. 계통이 제각기 다르므로 이들 식물이 비슷한 환경조건에 적응해 엇비슷한 구조의 화합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수렴진화라고 한다.

2012년 막스플랑크 연구진은 이미 알고 있던 가지과의 트로판 생합성 경로 유전자 염기 서열과 비슷한 뭔가가 코카나무 잎에도 있는지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유전자도 공통 조상으로부터 대물림되는 것이기에 이런 추적 실험이 가능하다. 처음 발견된 후각 유전자 1개의 염기서열을 바탕으로 줄줄이 후각 유전자를 찾아 노벨상을 탄 린다 벅(Linda Buck)이 정확히 이런 방법을 적용했다.

초식 곤충 신경계 교란시키는 역할은 같아

그러나 막스플랑크 연구진의 시도는 실패했다. 그들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되돌아갔다. 코카나무 잎에서 단백질을 분리하고 아미노산 서열을 확인한 다음 거기서 거꾸로 유전자를 찾아낸 것이다. 이 유전자는 아트로핀을 만드는 유전자와 기원이 사뭇 달랐다.

결론은 아트로핀과 코카인은 무늬는 같지만 유전적으로 팔팔결 다른 남남이라는 소리다. 초식 곤충의 입질에 맞서 그들의 신경계를 교란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화합물 두개가 서로 다른 곳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그러나 두 화합물이 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같다. 환각에 빠진 곤충을 광란의 춤으로 몰아넣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녹록지 않다. 그래도 봄이 오면 싹이 트기 바쁘게 곤충이 꿀을 찾아 날개를 펼친다.

김홍표 아주대학교 약학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