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실용의 중국, 이념의 한국

2025-03-27 13:00:03 게재

미국의 거듭된 견제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AI) 로봇 등 첨단기술과 전기차 태양광 등 신산업에서 중국의 굴기가 예사롭지 않다. 권위주의 체제의 강력한 동원력에 바탕한 국가주도형 불균형 발전전략에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중국경제에 인사이트를 제공하던 한국은 주력산업들이 중국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자유시장경제의 강점이 무색해지고 있다.

중국이 미래산업에서 혁신의 역량을 보여주는 배경에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외양과 달리 이념보다 실용을 중시하는 역사적 DNA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조선에서는 붕당정치의 이념적 토대가 됐으나 중국에서는 황권을 뒷받침할 관리를 선발하는 실용학문에 그쳤다. 19세기 서구 침략에 대항하는 변법자강 중체서용 양무운동 등이 공리공론에 머물자 미국 학자인 듀이의 실용주의를 배우는 학습열풍이 일어나고 5.4운동으로 이어졌다.

사회주의 중국에서도 실용의 정신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마오쩌둥은 소련의 도시노동자 중심 투쟁이 중국 현실과 괴리되자 농촌 중심의 도시포위전략으로 과감히 전환했다. 건국 후 마오의 이념과잉 통치가 나라를 벼랑끝으로 몰고 갔으나 뒤이은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론의 실용정책으로 개혁개방을 이끌어내 대국굴기의 기틀을 마련했다. 시진핑정부 또한 서구의 압박에도 ‘중국제조 2025’를 고수해 딥시크 열풍이나 전기차 도약 등과 같이 선진국의 기술장벽을 돌파하고 있다.

중국의 기술자강과 산업혁신은 중국을 하청으로 두고 투자이익을 향유하던 미국 독일 일본 등의 기득권을 위협하고 있다.

중국 기술굴기 배경엔 실용중시 전통 있어

한국은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가전제품 등 주력산업에서 누이좋고 매부좋던 호시절이 사라지고 적자생존의 제로섬 관계에 직면했다. 중국이 최종재의 경쟁력만이 아니라 자체공급망까지 완비해 한국 중간재 수요마저 줄어들고 소비재 또한 중국내 저가경쟁으로 가성비에서 밀려나고 있다.

우리가 중국의 급속한 추격을 허용한 원인은 다양하다. 서구 선진국이 중시하는 사회복지와 근로환경의 제도화를 우선하면서 경제의 혁신은 기업에게 맡겼다. 중국은 오히려 국가의 강력한 주도하에 중장기 산업발전계획을 마련하고 첨단산업에 필요한 기술개발체계와 우수인력양성교육체계를 구축했다.

중국제조 2025를 이끌던 리커창 전 총리가 2015년 “10년간 칼 한 자루 간다(十年磨一劍)”는 심정으로 첨단핵심기술을 개발하겠다고 할 때도 우리 주력산업의 기술장벽을 쉽게 넘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국은 중요 기술의 병목을 돌파하기 위해 준전시경제에 준하는 동원체제를 가동하고 핵심산업에 대한 전폭적 투자와 함께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제도적 장벽을 과감히 해소했다.

한정된 재원을 전기차 배터리 AI 등 선도산업에 투입하면서 전통산업이 위축되고, 산업현장 로봇 도입으로 노동자들이 실직하고, 공유차량 도입으로 밀려난 택시기사들의 불만이 커지고, 빅데이트 산업 육성을 위해 개인정보보호가 희생되어도 기회비용으로 간주했다. 특히 우수한 해외인재들을 ‘천인계획’ ‘만인계획’등 파격적 대우로 유치했다. 이들이 중국내 천재양성교육체계로 선발한 이공계 우수인재들을 AI 로봇 등 신산업에서 성공의 아이콘으로 길러내면서 이제는 과학기술 르네상스를 일궈내고 있다.

중국의 이러한 발전전략을 민주사회인 우리가 답습할 수는 없지만 진검승부를 위해서는 심기일전의 맞춤형 대응을 강구해야 한다. 산업경쟁력을 제약하는 노동환경이나 신산업의 발전을 가로막는 기득권의 조정, 빅데이터 산업을 제약하는 개인정보 보호 등에서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이념 굴레 갇힌 모습, 조선시대 당쟁과 같아

아쉽게도 우리의 현실은 그다지 녹록지 않다. 국가발전방향에 대한 구호는 많으나 합의는 요원하다. 중국 청년이 “중국은 비록 공산당 일당체제지만 국가만 생각하는데 반해 한국의 다당제 정당들은 정파의 이익만 고려한다”며 “중국의 정당제도가 더 낫다”고 우기던 비유가 떠오른다. 극좌 극우의 이념적 굴레에 갇혀 서로를 죽이려는 모습은 국가부강을 꿈꾸던 실학의 싹을 자르던 조선의 당쟁과 다르지 않다.

중국은 국가발전의 실용적 목표를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사실상 형해화시킨 나라다. 1990년대에 서구경제를 따라잡기 위해 노동자의 적이었던 자본가와 지식인도 공산당원으로 받아들여 국가발전의 상비군으로 적극 동참하게 했다. 우리사회에서 지금도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 공존의식이 강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중국이 더 실사구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에 ‘실용의 중국, 이념의 한국’이라는 말을 되뇌게 된다.

이창열

한국통일외교협회 부회장

중국사회과학원 경제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