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검찰과 법원과 헌재가 대행하는 빈사의 정치
할리우드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반전에 반전의 연속이다. 먼저 한덕수 국무총리가 그렇다. 그는 12.3 비상계엄과 관련해 이런저런 의혹을 샀다. 내란에 중요 임무 종사자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최소한 총리 직분에 걸맞게 대처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게다가 국회에서 선출한 헌법재판관 임명을 거부했다. 반면 국회를 통과한 법률안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거부권을 행사했다. 만일 후임 최상목 권한대행이 두 명의 재판관이라도 임명하지 않았다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은 오리무중으로 교착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헌법재판소는 24일 한 총리에 대한 탄핵소추를 기각했다. 재판관 임명을 거부한 것이 위헌 위법이지만 그렇다고 파면할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이에 “헌법을 적당히 위반하면 괜찮다는 거냐”라는 비아냥이 나왔다. 헌법수호가 지상 목표인 헌법재판소가 스스로 존재감을 지웠다는 비판이 일었다.
26일에는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나왔다. 판결은 무죄였다. 원심의 “선거법 위반 유죄,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뒤집은 거다. 극과 극을 오간 판결이다. 이 대표로서는 지옥에 굴러 떨어졌다가 천국으로 올라간 격이다.
도대체 법이 무언가. 어떤 법정은 까맣다고 판결하고 다른 법정은 하얗다고 판결하는 격이 아닌가. 한 총리의 귀환에 환호작약했던 쪽은 이 대표의 무죄에 분통을 터뜨렸다. 반대로 한 총리 탄핵기각에 실망한 쪽은 이 대표의 족쇄가 풀렸다며 만세삼창이다.
정치의 사법화로 죽어가는 정치
여당과 야당은 물론 국민까지 이제 관심은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다. 도대체 탄핵소추가 이뤄진 지 100일이 넘고, 피청구인의 변론이 끝난 지 30일이 넘었는데도 미적거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동안 대통령 리더십의 부재로 ‘트럼프 리스크’ 등 국내외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는 우려가 크지 않은가. 적이 강을 건너오는데 대의명분을 앞세우다 결국 죽음을 맞이한 송양지인(宋襄之仁)이 떠오른다.
한 총리와 이 대표에 이어 윤 대통령까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다. 여기에서 놓치는 게 있다. 바로 ‘정치의 죽음’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 말마따나 정치가 생물이라면 현재 한국의 정치는 잘 봐줘도 빈사(瀕死) 상태 아닐까.
정치권에 정치가 실종되고 검찰과 법원과 헌법재판소가 정치를 대행하고 있는 형국이다. 사실 이들 법조계의 공통점은 어릴 때 공부를 잘했고 조직에서는 상사에게 잘 보였으며 법률의 적용과 해석에 나름대로 유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이 보다 도덕적이거나 건전한 상식을 지녔거나 민주시민으로서 공동체 의식이 굳건하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시험을 잘 봤다는 것으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한 정치를 좌지우지해도 되나. 과거를 재단하는데 전문인 이들이 현재의 갈등을 풀고 미래 청사진을 제대로 그릴 수 있으리라는 근거가 있나.
미국의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극단적 정치권력의 탄생을 막기 위해 정당의 역할을 강조했다.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이자 민주주의의 문지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당 정치는 어떨까. 오히려 정치 양극화와 포퓰리즘으로 악화(惡貨)를 앞세워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상태 아닌가.
사실 우리의 엘리트는 어릴 때부터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정서 속에 살아왔다. 일류 대학을 거쳐 고시에 패스하면 모든 면에서 유능하고 선량할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윤 대통령을 석방한 법원과 항고를 거부한 검찰, 1심에서 이 대표에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 탄핵심판을 미적거리는 헌법재판관 상당수가 엘리트 출신이다.
22대 국회는 판사 검사 변호사 출신이 61명으로 전체의 30%를 웃돈다. 여당 비상대책위원장과 원내대표도 야당 대표도 법조인이다. 사법부는 물론 입법부와 행정부도 특정 대학 특정 직역이 독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양성이 생명이라면 이런 학벌과 직역 편향성은 독(毒)이겠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의 민주정치는 위기다. 법치(法治)만 있을 뿐이다. 법조인들이 주권을 획득하고 행사하는 법조공화국 체제 말이다.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 가져
이것도 결국 시민의 책임이라고 지적한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제프 메스트르는 “모든 국가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고 했다. 시민의 힘은 4~5년에 한번 투표장에서 발현하는 게 아니다. 평소에도 정치가 시민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엘리트 중심 권위주의가 희망찬 시민의 얼굴을 닮는다.
그래도 “정치는 내일 시드는 꽃에도 물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시들어가는 빈사의 정치에 한 주먹의 물을 뿌려야 한다. 바로 관심과 행동이다. 플라톤 경고처럼 정치를 외면한 대가로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계속 지배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