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멈춰선 영덕 해안가…집터엔 잿더미만

2025-03-28 13:00:03 게재

해안 30㎞ 폐허, 정박 어선 불타

경정3리 500년 보호 향나무 전소

전쟁터가 이랬을까? 사진과 영상 기록물로만 전쟁터를 본 세대에게 산불이 휩쓸고 간 영덕 현장은 융단폭격을 받은 전쟁터로 보였다. 28일 오전 9시 현재 의성산불로 발생한 경북도내 사망자 24명 중 9명이 영덕에서 나왔다.

지난 25일과 26일 영덕읍을 덮친 의성산불이 영덕 해안마을 일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영덕천지원전 후보지인 이 마을 주택 60여가구가 대부분 불에 탔다. 영덕 최세호 기자

27일 오후 찾은 영덕군의 아름다운 해변마을은 폐허로 변했다. 영덕풍력발전소가 있는 영덕읍 창포리에서 동해안 절경 해안선 북쪽으로 오보리, 노물리 석리, 축산면 경정리까지 30여㎞ 해안은 완전 초토화 됐다. 산과 강을 넘어 바다까지 화마의 손길이 뻗쳤다.

해안 항구를 중심으로 조성된 마을의 주택은 불에 타 휘어지고 부서지고 내려앉았다. 목조주택은 잿더미만 수북하게 쌓여 집터로 짐작케 했다. 시멘트 벽돌집도 무너져 내렸다.

영덕읍에서 7번 국도를 가로질러 도착한 창포리. 일명 ‘바람의 언덕'으로 불리며 1997년 산불로 민둥산이 된 곳에 들어선 24기의 풍력발전기는 멈춰섰다. 현재 전체 24기 중 1기만 돌아간다.

대탄리와 오보리 해안절경에 들어선 펜션과 휴게시설은 조준폭격을 당한 듯 뼈대만 앙상했다.

노물리는 150여가구 200여명이 사는 아담하고 평화로 왔던 포구마을인데 이날은 적막했다. 주민 한 두명이 뒷짐을 진채 망연자실한 듯 불타 버린 삶의 터전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주민 5~6명은 방파제에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며 마을을 쳐다봤다.

주택과 상가를 삼킨 불길은 항구에 정박한 소형어선도 불태웠다. 10여척의 배들이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렸다. 바닷물까지 뻗친 화마가 어민들의 생계수단까지 앗아갔다.

영덕 항구 가운데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석리항 마을은 폐허 그 자체였다. ‘따개비’ 마을이나 ‘석동’ 마을로도 불리는 곳이다. 항구 뒤쪽 기암괴석 해안절벽에 미로를 연결해 옹기종기 계단식으로 자리를 잡은 60여가구의 주택 중 성한 곳은 손꼽을 정도다. 온전한 시설은 항만에 건립된 체험센터뿐이었다

한때 원자력발전소 부지에 포함돼 사라질 위기에 몰렸으나 문재인정부 때 중단됐다 윤석열 정부가 다시 영덕 천지 원전 1·2호기 후보지로 지정한 곳이다. 당초 예정대로 원전이 들어섰다면 엄청난 재앙도 일어날 수 있었다. 원전건설 여부를 떠나 석리는 이번 산불로 완전 소실됐다.

대게마을로 유명한 경정3리에서는 50여 가구 중 20여 가구가 산불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마을 주민 60여명은 지난 25일 밤을 뜬 눈으로 보냈다. 불이 급습하자 긴급하게 대피하려고 차를 몰고 나섰으나 해안도로를 따라 불이 확산되면서 마을 진입로가 막혀 방파제쪽에 모두 모였다.

이장과 청년들이 대피문자를 받고 집집이 방문해 노인들을 업어 대피시켰다. 방파제에 고립된 주민들은 해경에 구조를 요청해 대형구조함을 타고 바다로 탈출해 축산항 활어센터로 피신해 목숨을 구했다.

30년째 대게식당을 운영하는 이기순(74) 할머니는 “내 평생 산불이 바다동네까지 덮칠 줄은 상상도 못했다”며 “연기도 자욱하고 몸을 날릴 정도의 강풍이 불어 어찌할 바를 몰라 마을앞 방파제로 몰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 A씨(60)는 “우리마을은 지진해일 등이 나면 대피할 장소가 마을 뒷산과 버스승강장인데 캄캄한 밤에 노인들이 대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해경의 도움을 받아 활어센터로 피했는데 그 곳에는 난방시설이 전혀되지 않아 밤새 노인들이 추위에 떨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경정3리에는 500여년 세월을 버틴 보호수 오매향나무도 타나 남은 가지만 남기고 재로 변했다. 향나무를 등지고 있는 마을경로당과 재실도 기왓장 몇 조각만 남기고 사라졌다.

다행히 영덕을 삼킨 산불은 축산항까지 번지지는 않았다. 해안선을 따라 북상하던 산불은 방향을 바꿔 축산천을 넘어 내륙으로 향하면서 광기를 멈췄다.

한편 지난 22일 의성에서 발생한 산불이 80여㎞ 떨어진 영덕읍까지 덮쳐 날벼락같은 피해를 입혔다. 지난 25일 오후 6시쯤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를 타고 영덕읍과 동해안 마을로 급습해 불과 4~5시간 만에 영덕 해안가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재민은 1000여명에 달했고, 피해면적은 7819㏊다. 한창 대게철을 맞아 성수기를 맞은 영덕군민들의 일상은 멈춰섰다.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최세호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