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시평
미-중-러 세력균형과 역사의 귀환
회색코뿔소의 기세로 트럼프 행정부가 쏟아내는 ‘관세폭탄’은 점입가경이다. 트럼프 2기의 일방주의 정책과 경제 위협은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한다. 타국의 주권에 속하는 그린란드, 파나마 운하, 가자지구 관할권을 주장하고 우크라이나에는 굴욕을 강요한다. 이에 대해 미국의 아이켄베리(G. John Ikenberry) 교수는 “최근 몇달간 세계 최고의 수정주의로 변모한 국가가 다름 아닌 미국”이며, 트럼프 행정부가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사실상 해체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국제체제는 바야흐로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맞았다. 동맹도 팽개치고 더 이상 공공재 부담을 감당하지 않겠다는 트럼프식 신 고립주의 노선이 결국 1극체제 붕괴와 패권 전이로 종결될 지 아니면 새로운 패권 재건을 통해 역사 경로를 다시 쓰는 기적을 이루어 낼 지 기로에 있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종전안은 러시아가 빼앗은 땅을 인정해주고 ‘광물협정’이란 이름으로 미국이 패전국 우크라이나에서 배상금을 걷어가는 구조다. ‘30일간 제한적 휴전’ 합의는 푸틴의 시간 벌기 회피용에 불과하다. 개전 목표였던 우크라이나 무장해제ㆍ중립화ㆍ비(非)나치화의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푸틴 입장에서는 트럼프의 중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젤렌스키 입장에서도 안전보장 없는 ‘광물협정’이 불만이다. 트럼프 국제질서재편 전략의 전제조건인 조기 종전 구상은 그래서 난항을 겪고 있다.
강대국 정치의 새 질서와 세력분점
여기에 지난 2일 모든 국가에 부과한 상호관세 폭탄은 전면적인 글로벌 통상전쟁 선포를 의미한다. 트럼프행정부의 일방주의와 무차별 관세로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체제가 붕괴되면서 자연히 향후 대안 질서에 관심이 쏠린다. 이에 대해 브릭스와 글로벌사우스를 잇는 신 공급망 출현과 함께 정치적으로는 미중러 3자 세력균형 체제로 복귀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트럼프가 푸틴과의 화해를 통해 시진핑을 고립시키려는 ‘리버스 닉슨(reverse-Nixon)’ 전략이 미완에 그친 채 절충적인 세력분점으로 정립(鼎立)될 거라는 얘기다.
먼저, 미국과 러시아 관계개선엔 한계가 있다. 안보 데탕트만으로는 파트너십이 성숙되지 않는다. 체제와 이념 측면에서 가치를 공유하기 어렵다. 경제적으로도 양국은 보완관계가 아니라 상호경쟁관계다. 미국의 석유산업 재개와 LNG 프로젝트, 원유와 천연가스 증산정책은 러시아의 자원수출과 이해가 충돌한다. 트럼프의 친원자력 정책도 세계 원자력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러시아와 경쟁관계다.
둘째, 중국과 러시아 협력은 상호보완적 성격이 강하다. 양국은 과거 냉전 시기 갈등과 경쟁에서 벗어나 지금은 글로벌 안보 목표를 공유하며 전략적 협력의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남북수송회랑과 북해항로, 그리고 일대일로를 연결함으로써 경제 밀착을 가속화하고 있다. 정기 연합군사훈련과 전략폭격기의 동아시아 합동순찰도 이루어진다. 그래서 1970년대 데탕트와 국경충돌 이념분쟁에 편승했던 미국의 중-소 이간전략이 지금은 먹히기 어렵다.
셋째,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다. 트럼프정부는 중국에 대해 가중치 압박을 가하고 있다. 10% 기본관세와 펜타닐 소극 협조에 대한 10% 보복관세에 더해 34% 상호관세를 또 부과했다. 정면충돌을 자제하던 중국은 단호한 ‘반격’을 예고하며 보복관세와 수출통제, 반독점위반 조사, 위생검역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기본기조는 군사력 강화와 함께 독자 기술력 발전의 장기적인 대응이다.
미국의 조급하고 무리한 종전협상 추진과 전방위 관세전쟁의 배후에는 패권 지배력의 약화가 자리잡고 있다. 미국 중심 서방 국가의 집단 결속력이 점차 약화되는데 비해 중국과 러시아 중심의 글로벌사우스 결속력은 지속 강화되고 있다.
역사의 귀환에서 지혜를 찾아야
탈냉전 시대 35년이 흐른 지금 세계 질서는 냉전 이전의 역사로 귀환했다는 평가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홉스식 강대국 세력정치의 재림이다. 동맹국으로부터 ‘삥’을 뜯는 미국의 일방주의는 패권전이의 원심력으로 작동할 수 있다. 신 유라시아주의 등장과 역사의 귀환은 그렇게 시작됐다.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장관이 지난 3월 말 첫 아시아 순방에서 괌을 거쳐 필리핀과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갔다. 과거 국제질서 재편 시기 ‘가쓰라 태프트 조약’과 ‘애치슨 라인’의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역사는 언제라도 다시 귀환한다. 급변하는 국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 역사 변화의 흐름에 편승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