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세계화 … 고민 깊어진 독일
지난 30년 자유무역 최대 수혜국 … 슈피겔 "독일 정부 새로운 시대 성장모델 모색"
세계화가 위태롭다. 자유무역의 최대 수혜국이었던 독일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비슷한 발전모델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독일정부와 글로벌 기업, 유럽연합 등을 대상으로 세계화 후퇴 시대의 생존법을 취재했다. 두 차례에 걸쳐 독일의 고민을 들여다본다. 편집자주
10여년 전부터 글로벌 금융위기에 유럽 난민위기,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심각한 기상이변,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전쟁 등 각종 위기가 잇따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막 시작한 거대한 시대변화의 시사회같은 느낌이다. 세계화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세계화는 지난 30년간 세계질서를 규정하는 말이었다. 모든 정치적 결정을 예고하는 지침이었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일할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지, 누가 친구이고 적인지는 세계화가 결정했다.
세계화는 또한 인류의 발전에 대한 확실한 비전이었다. 전세계는 점차 번영하고 필연적으로 현대화되며 더 자유롭고 민주적으로 변할 것이었다. 경제적 연대는 공동의 가치를 만들고, 최소한 과거보다는 평화스러운 세계를 만들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이같은 생각은 우크라이나전쟁으로 무너졌다. 요즘 모든 이들은 세계화의 종말을 입에 올린다.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지난 5월 말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수십년 동안 자유와 안보, 번영을 보장했던 국제협력 시스템이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외국의 공급망에 의존하지 말고 미국이 직접 만들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한다. 미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우방국을 중심으로 교역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독일의 글로벌 화학회사 바스프의 CEO 마르틴 브루더뮐러는 최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알던 세계화로 되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며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기업 리더들도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 글로벌 기업들은 새로운 공급망을 모색하고 있다. 개별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생산시설을 속속 옮긴다. 수많은 외국 노동자들과 함께 외국자본이 중국을 떠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제롬 파월 의장은 "세계화는 멈춰선 것뿐 아니라 역행하고 있다"고 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옌스 스톨텐베르그 사무총장은 "자유무역보다 자유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전세계 국가들은 다시 한번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고 있다.
사실 우크라이나전쟁이 세계화에 대한 첫 번째 결정타는 아니다. 세계화에 대한 공격은 수년 동안 누적됐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중국과 무역전쟁을 개시했다. 영국은 유럽연합(EU)을 떠났다. 헝가리에서 브라질까지 포퓰리즘 정권이 경제국유화를 재시도하고 있다.
2008~2019년 글로벌 교역은 약 5% 감소했다. 2016~2019년 글로벌 투자는 반토막 났다. 세계은행은 우크라이나전쟁으로 글로벌 교역량이 최소 1% 위축될 것으로 전망했다.
잇따르는 세계화 종말 선언
독일 로베르트 하벡 경제부장관은 최근 요르단과 이스라엘 미국 카타르 등을 순방했다.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새로운 교역국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드러나지 않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세계화에 기반한 세계질서가 와해되는 상황에서 그는 독일의 새로운 번영 모델을 찾아야 한다.
독일은 그동안 초세계화(hyper-globalization) 덕분에 어느 나라보다 큰 혜택을 입었다. 1990년 이래 독일의 상품과 서비스 무역량은 4배 가까이 늘었다. 같은 기간 1인당 소득은 50% 가까이 상승했다. 세계화가 쇠퇴하면 독일경제 역시 쇠퇴한다. 독일 뮌헨대 산하 라이프니츠 경제연구소(이포연구소) 클레멘스 푸에스트 소장은 "독일의 번영이 위기에 처했다"고 말했다.
이는 엄살로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지표가 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독일 기업들의 매출이 감소하고 있다. 독일이 자랑하는 정밀기계들은 전세계 시장에서 계속 판매량이 줄고 있다. 게다가 거의 모든 물가가 오르는 중이다. 전세계가 탈세계화 할수록, 공개시장에 기반한 독일의 성공모델은 더 취약해진다.
부총리를 겸한 하벡 장관은 독일이 새로운 형태의 세계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른바 '보다 공정하고 지속가능한 세계화'다. 그는 이 개념에선 안보와 도덕적 고려가 중대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벡 장관은 "시진핑 주석의 중국은 경제력을 앞세워 지정학적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며 "서구적 가치에 기반한 경제정책을 가진 독일과 유럽은 미래에 중국과 대항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정부는 5월 말 폭스바겐의 중국 투자에 대한 보증을 취소했다. 폭스바겐 공장이 중국의 강제노동이 의심되는 위구르 지역에 있다는 이유였다.
하벡 장관은 민주적 가치를 구현하는 국가들끼리 협력하길 원한다. 예를 들어 조 바이든의 미국, 에마뉘엘 마크롱의 프랑스, 쥐스탱 트뤼도의 캐나다 등과 같은 동맹국이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엔 의문이 제기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곧 세계무대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반쪽자리 동맹이 될 수 있다.
반면 숄츠 총리는 다보스포럼에서 새로운 세계질서는 모든 이의 이해관계를 신뢰성 있게 다룰 수 있는, 지금과는 매우 다른 권력을 중심으로 구축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전략적 의존성을 줄여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그동안 자유무역과 노동분업에서 얻은 경제성장 이득을 여전히 중시한다. 글로벌 가치사슬을 외면할 경우 관세전쟁과 물가폭등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튀빙겐대학교 경제학자들이 추산한 바에 따르면 독일이 세계무역에서 완전 철수할 경우 GDP 20%가 줄어든다.
숄츠 총리가 상상하는 향후 질서는 최근 독일에서 열린 G7 확대정상회담 초청국에서 엿볼 수 있다. 선진 7개국뿐 아니라 인도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세네갈 아르헨티나 등 3개 대륙 5개국을 특별 초청했다. 세네갈은 55개국을 회원으로 둔 아프리카연합 의장국이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인도와 남아공이다. 브라질 러시아 중국과 함께 브릭스를 구성한다. 브릭스는 서방의 G7에 대응하는 신흥경제국 연합을 표방하는데, 세계무대에서 영향력이 지속 상승하고 있다.
숄츠 총리는 그동안 '전세계 모든 나라들이 서구 민주주의 국가처럼 되기를 희망한다'는 서방의 잘못된 관념을 거듭 비판해왔다. 그같은 태도는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을 중국과 러시아 편에 서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숄츠 총리와 하벡 장관이 공유하는 점도 있다. 더 이상 전세계 경제를 과거처럼 시장의 흐름에 내맡길 수 없다는 인식이다. 더불어 경제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태도도 멈춰야 한다고 본다.
저렴한 생산 대신 안정적 생산
세계화의 승자를 한명 꼽으라면 글로벌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이 유력하다. 글로벌 금융 거물 중의 거물이다. 블랙록은 독일 GDP 3배에 육박하는 10조달러 이상의 자산을 굴리는 회사다.
핑크는 1988년 블랙록을 설립했다. 세계화의 시대가 모습을 갖춰가던 때이자 월가 금융산업이 막 기지개를 펴던 때다. 블랙록의 레시피는 단순했다. 가능한 한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고, 저렴하고 광범위하게 투자하는 것이다. 최고의 기업들을 찾는 수고도 필요치 않았다. 계속 커지는 금융자본의 파도가 돈을 밀물처럼 쓸어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핑크는 세계화와 자본시장이 공생적 관계라는 점을 진즉 눈치챘다. 금융투자자들은 국가간 장벽을 무너뜨렸고 그 덕분에 전례없는 규모의 자본이 전세계를 휘젓고 다녔다. 많은 국가들이 국제자본에 문호를 개방했다. 완강했던 중국 자본시장의 문도 열렸다. 세계화를 통해 금융산업만큼 부유해지고 강력해진 산업은 없었다. 블랙록은 독일 블루칩증시인 닥스지수에 상장된 40개 기업 중 33개 회사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전세계에 걸쳐 수백개 우량기업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핑크는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장기적으로 보면 연결된 세계경제, 글로벌 자본시장의 힘을 여전히 믿는다"면서도 "하지만 우크라이나전쟁으로 우리가 지난 30년 동안 보아온 세계화는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기업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 사업하는 기업들도 떠날 수 있다. 주주뿐 아니라 직원과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며 "기업들은 자국시장에 가까운 곳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해야 할 것이다. 지난 수십년 저렴한 생산이 가장 중요했지만, 이젠 안정적 생산이 보다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핑크는 "이같은 전환으로 혜택을 볼 대표적인 나라는 멕시코와 브라질이다. 생산비용이 저렴하지만 어느 정도 인권보호가 이뤄지는 국가들"이라며 "하지만 이는 고비용을 요한다. 물가를 더 오르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핑크는 유럽이 자체적인 경제블록을 추진하는 것, 중국과 탈동조화하려는 것을 경고했다. 그는 "선도적인 기술기업들은 미국과 중국 한국에서 나온다"며 "유럽은 기술에 보다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한다. 독일 역시 발빠르게 기술에 투자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중국과의 관계설정, 그것이 문제로다" 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