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예산안, 이것이 문제다 | ② 입법부 '패싱'
중장기 사업, 1년짜리로 편성 … 국회 승인 없이 사업변경 가능
헌법 규정한 계속비·명시이월비, 2015년부터 신규 편성 중단
국가 채무 부담 있는데도 미편성 … "헌법·법률 취지 벗어나"
예산편성권을 갖고 있는 행정부가 입법부의 예산심사권을 무력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헌법에서 국회 승인을 받도록 규정한 항목들을 법률과 시행령으로 회피하는 방법을 만들어 손쉽게 '입법부 패싱'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규모 사업인데도 '계속비'로 편성하지 않고 장기계속계약을 통해 국회 의결 없이 사업변경을 가능하게 만들고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예산을 '명시이월비'로 편성하지 않고 임의로 이월시키는 방식으로 국회 심사를 건너뛰기도 했다. 국가의 부담을 발생시키는 데도 '국고채무부담행위'로 편성하지 않아 국회의 사전 의결을 건너뛴 경우도 확인됐다.
31일 국회 예산정책처는 '2024년도 예산안 총괄분석보고서'를 통해 "대규모 개발사업의 경우 헌법과 국가재정법에 따라 총액과 (매년 들어가는) 연부액에 대해 미리 국회의 의결을 얻어 지출해야 하지만 정부는 계속비 사업을 편성하지 않고 총사업비관리제도와 장기계속계약을 활용해 계속비 제도를 우회해 사실상 형해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는 2014~2017년간 매년 20조원대의 계속비 사업을 유지했지만 2015년부터 신규지정을 멈췄다. 이후엔 기존 사업만 계속비 사업에 편성됐고 그마저도 2021년에 종료됐다. 2022년부터는 계속비 사업 예산이 편성되지 않고 있다. 장기계속계약은 수년간 계속 존속할 필요가 있거나 여러 해 이행해야 하는 계약으로 총공사금액을 기재하지만 '각 회계연도별'로 계약을 체결한다. 따라서 계속비는 총사업비와 연도별 소요를 동시에 국회 의결을 받아내야 한는 반면 장기계속계약은 매 회계연도마다 예산을 확보하게 된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지선 예산분석관은 "계속비 사업은 총액과 연부액에 대해 국회 의결로 관리되는 반면 장기계속계약과 총사업비관리제도는 국회 승인 없이 총사업비 변경이 가능해 사업비가 빈번하게 증액될 수 있고, 단년도 예산으로 편성되므로 전체 사업규모를 고려해 사업의 우선순위 등을 판단하기 어려워 관련 예산안 심의를 부실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국회의 예산안 심의·확정권과 재정운용의 투명성, 책임성을 저해하는 측면이 있다"고 했다. "계속비 사업은 헌법상 재정 제도이고 국가재정법에서는 대규모 개발사업의 경우 원칙적으로 계속비로 편성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대규모 공사를 장기계속계약으로 추진하는 것은 헌법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도 했다.
◆국회 사전 승인 받는 명시이월비 미편성 = 국회 승인을 받아야 하는 '명시이월비' 편성도 정부가 회피하는 항목이다. 명시이월비는 국가재정법(제24조)에 따라 연도 내에 지출을 끝내지 못할 것이 예측되는 경우에 그 취지를 세입세출예산에 명시해 미리 국회의 승인을 얻는 후 다음 연도에 이월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경비다. 이는 단년도로 종료하게 하는 경우 오히려 예산집행상 비효율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어 미리 국회의 의결을 거쳐 이월을 허용해 이월의 남용을 막고 국회의 재정통제권을 보장하려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정부는 2014년도 예산안에 국방부와 방위사업청 소관 2개 사업을 편성한 것을 마지막으로 2015년도 예산안부터는 '명시이월비'를 편성하지 않고 있다. 이 예산분석관은 "예산을 편성하였으나 사업절차 등의 특성상 일부 이월이 불가피한 경우가 존재함에도 정부는 최근 10년간 명시이월비를 전혀 편성하지 않고 있어 사실상 '국가재정법'이 명시적으로 규정한 명시이월비 제도를 사문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는 경비의 성질상 연도 내에 지출을 끝내지 못할 것이 예측돼 명시이월비 요건에 해당하는 경비에 대해서는 국가재정법에 따라 명시이월비로 미리 국회의 승인을 얻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채무 부담인데 국회 승인 '패스' = 국고채무부담행위 역시 국가재정법에 의해 미리 국회의 의결을 얻도록 하고 있지만 2024년도 예산총칙안에는 편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의 부담을 발생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회의 사전 의결을 받지 않고 있는 사업이 지목됐다. 구체적으로 정부의 사후 상환 의무가 주어지는 '농협채권 및 정부양곡 정산' 사업, 공공청사 위탁개발의 임차료 지급, 임대형 민간투자사업의 위탁개발임차료 정부지급금 사업 등이 제시됐다.
이 예산분석관은 "정부가 국회의 사전의결 없이 국가의 채무부담을 발생시키는 약정을 한 후 채무 상환을 위한 비용을 단년도 예산으로 편성하는 관행이 다수의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헌법 제58조에서는 국채를 모집하거나 예산 외에 국가의 부담이 될 계약을 체결하려 할 때에는 정부는 미리 국회의 의결을 얻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가재정법에서는 국고채무부담행위에 대해 국회의 의결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헌법과 국가재정법상 관련 규정에 부합하지 않고 국회의 재정통제권을 침해하는 측면이 있어 국회의 사전의결을 얻는 방안을 검토하거나 사업방식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