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김빠진 '밸류업’…기업 자율성만 부각해 실효성 의문
쪼개기 상장 등 비재무지표 공시 권고 … 참여 여부·공시내용 모두 기업에 맡겨
금융당국이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한 기업 가치제고(밸류업) 계획 가이드라인(안)을 공개했다. 이번에는 모자회사 중복 상장(쪼개기 상장)과 대주주의 비상장 개인회사에 대한 이익 이전(터널링)에 대한 내용 등 비재무지표 공시 권고 등 구체적 내용이 추가됐다. 하지만 공시 참여 여부와 어떤 내용을 담을지를 모두 기업 자율에 맡겼다. 그동안 우려 사항으로 꼽혔던 자율성이 오히려 강조되면서 시장에서는 ‘또 김빠진 밸류업 방안’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기업들이 지키지 않아도 별다른 제재가 없기 때문에 말뿐인 대책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다. 증권가 전문가들은 시장 기대와 달리 기업 자율성에 바탕을 둔 이번 대책이 국내 자본시장에 안착할 수 있을지 우려했다.
◆최종안 5월 말 발표 예정 = 금융위원회와 한국거래소, 자본시장연구원 등 유관기관은 2일 열린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 2차 세미나’에서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안)을 공개하며 ①기업개요 ②현황진단 ③목표설정 ④계획수립 ⑤이행평가 ⑥소통 등의 목차별 작성방법을 제시했다. 금융당국은 연 1회 이상 주기적으로 공시하는 것을 권고했다.
현황진단은 중장기적인 가치 제고 목적에 부합하는 핵심지표를 선정해 분석한다. 재무지표의 경우, PBR(주가순자산비율), PER(주가수익비율) 등 시장평가와 ROE(자기자본이익률), ROIC(투하자본이익률) 등 자본 수익성 지표, COE(주주자본비용), WACC(가중평균자본비용) 등 자본 비용의 자본 효율성 지표가 있다. 배당, 자사주소각, 주주환원율 등 주주환원과 매출액 증가율, 영업이익 증가율, 자산 증가율 등 기업 성장성 지표도 있다.
비재무지표는 지배구조와 관련한 일반주주 권익 제고, 이사회 책임성, 감사 독립성을 위한 여러 요소들이 포함된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상장사들은 연 1회 등 주기적으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자율적으로 공시해야 한다. 아울러 ‘쪼개기 상장’ 이슈가 있는 경우 모회사 주주의 권익 보호를 위한 계획을 설명하거나 물적분할 후 분할 자회사를 비상장 완전자회사로 유지하는 계획을 밝힐 수 있다고 권고했다. ‘터널링’의 경우 상장사와 비상장 개인회사 간 이해상충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정확한 사실관계나 향후 계획을 설명할 수 있다고도 제안했다.
목표설정은 핵심지표 관련 중장기 목표를 제시하는 단계. 목표 또는 계획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거래소 공시 규정 등에 면책제도 활용해 기업의 부담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운영할 계획이다. 계획수립에서 기업은 목표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작성하며, 사업부문별 투자, R&D확대, 사업 포트폴리오 개편, 자사주 소각 및 배당, 비효율적인 자산 처분 등 다양한 계획수립이 가능하다.
금융당국은 향후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해설서 제정안을 5월중 확정할 계획이다. 아울러 기업 밸류업 통합 홈페이지, 투자지표 비교공표도 함께 개시해 준비가 되는 기업부터 차례로 ‘기업가치 제고 계획’을 수립하고 공시할 것을 권고할 계획이다. 코리아 밸류업 지수는 3분기 내 개발하고, 연계된 ETF 상장은 4분기로 예정했다.
◆준비된 기업부터 공시 … 안 해도 그만? = 문제는 기업가치 제고 방안이 상당부분 기업 자율성에 의존하고 있어 실효성에 의문이 크다는 점이다. 지난 1차 세미나에서 가이드라인 초안이 발표될 당시에도 밸류업 미달 기업 거래소 퇴출 등 패널티를 기반으로 한 강제성, 상법개정 논의가 배제되어 실망매물이 쏟아지기도 했다. 2차 세미나에서 구체적인 방안이 공개된 이후에도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소위 ‘밸류업 수혜주’로 불리던 섹터·종목 등은 오히려 주가가 더 하락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번 가이드라인 방안에 따르면 참여 여부뿐만 아니라 어떤 지표를 중심으로 서술할지, 향후 몇 년을 목표로 계획을 세울지 등 작성 내용도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하게 했다. 재무지표의 경우도 어떤 항목을 공시할지도 기업이 정한다. 적자 기업의 경우 영업손실을 본 상태라 PBR이나 PER 등을 입력하지 않고 매출·이익 증가율 중심으로 작성할 수 있다. 증권가에서는 이런 사항이 투자자에게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허위공시 우려도 나온다. 일단 밸류업 테마주를 노리고 공시에는 참여를 한 뒤 허위 공시를 통해 투자자를 현혹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상장사가 기업가치 제고 계획상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불성실 공시에 해당하는지 여부도 판단하기 어렵다.
기업의 ‘자율성’을 강조하면 기업가치 제고 계획에 핵심내용이 포함되지 않고 부실한 계획이 수립될 우려가 있다.
◆기업 자발적으로 움직일 동기부여 없어 = 기업의 동기부여가 없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은 논평을 통해 "가이드라인의 구체성은 좋지만, 주가 상승에 대한 지배주주와 일반주주의 인식이 상반되는 현실에서 기업과 이사회가 왜 기업가치를 제고하고 주가를 올리고자 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근거 제시가 없다"고 지적했다.
포럼은 "이러한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HD현대마린솔루션의 상장"이라며 "지난 2022년 금융위원회가 매우 구체적인 물적분할 후 자회사 상장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2월 이후 밸류업 프로그램이 정부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이 HD현대 그룹은 HD현대의 자회사인 HD현대마린솔루션을 상장시키겠다고 준비했다"는 점을 꼬집었다.
이남우 포럼 회장은 "이번 가이드라인(안)에 이와 같은 거버넌스 개선과 관련된 핵심 이슈들이 빠진 점이 매우 안타깝다"며 "주주에 대한 책임 소재 명시와 같은 탄탄한 제도적 기초 없이 기술적인 조치만 나열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또 "몇 주 후 가이드라인(안)이 확정되는 시점에 국민연금의 구체적인 역할에 대해 언급이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영숙 기자 kys@naeil.com